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엄태웅 5

건축학개론 (블루레이)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2012년)은 1990년대 청춘들을 위한 송가다. 1994년 대학 새내기들을 주인공으로 그 시절 첫 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잔잔한 영상으로 담아 냈다. 한동안 '친구' '말죽거리잔혹사' '고고70' 등 1970년대와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등장하더니, 이제는 90년대 시대상을 담은 작품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벌써 90년대 학번들을 다룬 작품이 등장했나 싶었는데, 그 시절을 모르는 세대들도 이 영화를 많이 봤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특히 수지가 이제훈에게 듀오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을 들려주며 "너 전람회 몰라?"라고 묻는 장면에서 '졸라맨'으로 들었다는 사람이 많다는 이 감독의 설명을 듣고 실소가 나왔다. 그만큼 전람회 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

건축학개론

집은 추억을 간직한다. 세월이 흘러 사람이 변하듯 집도 낡고 퇴색해 가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흔적들은 오래된 사진처럼 고스란히 남아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오래된 집에서 시작해 새 집으로 끝난다. 오래된 집에는 풋풋했던 대학 시절 첫사랑의 기억이 묻어 있다. 자신만만하면서도 사실은 두렵고, 좋아하면서도 그런 척 하지 않는 용기와 두려움, 사랑과 질투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함께 도사리고 있는 청춘기의 사랑은 그래서 시행착오적일 수 밖에 없다. 이제훈과 수지가 연기한 청춘의 사랑은 그만큼 안타깝고 불안하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된 새 집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기 위한 매개체가 된다. 하지만 엄태웅과 한가인이 연기한 훗날의 두 사람은 결코 옛 기억에서 자유..

영화 2012.03.24

시라노 연애조작단

어려서 TV에서 본 흑백영화 '시라노'는 참으로 슬픈 영화였다. 1950년에 개봉한 이 작품은 우스꽝스럽게 코가 큰 검객 시라노가 다른 사람의 연애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이야기다. 하필 연애 편지의 대상은 시라노가 사랑하는 여인. 못난 외모 때문에 여인 앞에 나서지 못하는 시라노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시라노의 대필 덕분에 남자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시라노는 끝까지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면서 시라노와 함께 참전한 남자가 죽고 만다. 시라노도 중상을 입었지만 남자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사랑하는 옛 여인을 찾아간다. 그제사 여인은 뒤늦게 편지의 주인공이 시라노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시라노는 숨을 거두고 만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가 로맨틱 코미디의 소재로 다시 ..

영화 2010.09.26

님은 먼 곳에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는 대중적인 오락 영화를 좋아한다면 쉽게 볼 만한 작품은 아니다. 줄거리를 강조하는 하이틴 소설같은 TV드라마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달리 흘러간 정서를 담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요즘 정서가 아닌 지나간 세월과 1960, 70년대 문화가 녹진 녹진하게 묻어 있는 옛 것이라는 점이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그런 가수가 있었던가 싶은 '쇼쇼쇼' 시절의 김추자의 히트곡 '님은 먼 곳에'를 제목으로 붙인 것부터 시작해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팔려가다시피 참전한 월남전, 여기에 70년대 트로이카였던 정윤희를 닮은 수애까지 영화 속 모든 게 옛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는 월남전에 참전한 남편을 찾아 떠나는 아내(수애)의 이야기다. 사랑하지도 않고 애틋한 정도 없는 여..

영화 2008.08.0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1등을 고집하지 않아 마음에 든다.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 세상에서 2등은 곧 루저요, 패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2등의 이야기로 1등 못지 않은 꿈과 희망, 감동을 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여자핸드볼팀은 2등이었지만 위대한 루저였다. 핸드볼이 발붙일 곳 없는 척박한 토양에서 살림과 운동을 함께 하며 신화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신산스런 나날이 영화를 보는 동안 절로 한숨이 나오고 지치게 만든다. 어찌보면 그래서 1등이 더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저렇게까지 해서 얻는게 무엇인가. 영화속에서는 실업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는데도 불구하고 팀이 해체되면서 초등학교 핸드볼팀으로 옮겨간 어느 감독의 입을 빌어 이..

영화 2008.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