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홋카이도 11

철도원(블루레이)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鐵道員: ぽっぽや, 1999년)은 눈발이 펄펄 날리는 풍경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 속에 검은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플랫폼에서 오롯이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영상은 한 폭의 시다. 그만큼 이 작품은 영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영상이 전부인 작품은 아니다. 이야기나 서정적인 연출, 배우들의 묵직한 연기 또한 영상 못지않게 훌륭하다. 아사다 지로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일본 단카이 세대의 아픔과 회한을 그리고 있다. 일본 단카이 세대는 1960년대 이념적 갈등의 시기인 전공투 시절을 거쳐 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가족과 일터를 위해 개인을 버려야 했던 그들은 일과 직장, 가족이 전부였던 세대다..

세 번째 살인(블루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三度目の殺人, 2017년)은 특이한 영화다. 고용주를 죽여 체포된 중년의 공장 노동자 미스미(야쿠쇼 코지)가 형량을 낮추기 위해 사건을 조사하는 변호사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사건을 오리무중에 빠트린다. 마치 일부러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미스미는 유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면 이를 뒤집는다. 심지어 살해된 사장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가 결정적인 증언을 하겠다며 나서지만 미스미는 이 조차도 거부한다. 이쯤 되면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헷갈린다. 도대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 속에 진실은 없고 팩트, 즉 사실만 있다. 팩트는 미스미가 사장을 죽였다는 것. 사실은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현상 뒤에 숨은 의미를 알려면 진..

다시 찾은 비에이

[한겨울 비에이 날씨는 변덕스럽다. 구름이 끼고 눈발이 날리다가 해가 뜨기도 한다.] 홋카이도(북해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경을 꼽으라면 단연 비에이다. 비에이라는 지명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 말로 비옥한 땅, 혹은 흐린 강이라는 뜻이 피이에에서 유래했다. 비에이는 홋카이도 가운데에 위치한 드넓은 벌판이다. 여름에는 이 곳이 보랏빛 라벤더를 비롯해 형형색색의 꽃밭으로 바뀌고 겨울에는 온통 설원이 펼쳐진다. 국내에는 예전에 배우 소지섭이 출연한 소니의 카메라 광고로 유명한 곳이다. 비에이 관광은 기차나 버스, 택시, 렌트카를 이용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현지 한국인 가이드를 통해 패치워크 로드나 파노라마 로드 등 코스별로 둘러보면 좀 더 편하다. [비에이의 명물인 흰수염 폭포.] ..

여행 2016.03.13

비 내린 삿포로

[JR삿포로역에 붙어있는 JR타워 닛코호텔 31층 객실에서 내려다 본 삿포로 풍경. JR타워 닛코호텔은 상당히 훌륭한 호텔이다. 잠옷 및 유카타까지 비치해 놓아 밤에 잘 때 아주 편하다. 호텔 22층에는 도심의 야경을 내려다 보며 즐길 수 있는 사우나도 있다.] 2008년에 두 번이나 찾았던 홋카이도의 삿포로는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말 그대로 설국이었다. 허허벌판이나 숲이면 이해하겠는데 서울같은 대도시인 삿포로가 온통 눈 세상이었으니 놀랍기도 하고 황당했다. 그만큼 홋카이도는 눈의 천국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때 못지 않은 놀랍고 황당한 풍경을 만났다. 설국인 홋카이도에 기상이변으로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착하기 전날에는 폭우까지 쏟아졌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에도 삿포로에 비가 내..

여행 2016.03.01

러브레터 (블루레이)

국내 개봉전인 1997년, 불법복제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봤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Love Letter, 1995년)는 사실 플롯이 정교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기본 골격은 산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남자친구와 이름이 똑같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남자친구가 과거 짝사랑했던 사연을 알게 되는 여인의 이야기다. 죽은 남자친구는 짝사랑했던 여인을 못잊어 똑같이 생긴 지금의 여자친구를 좋아한 것.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토록 좋아한 여인이라면 왜 한 번도 찾아가 고백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오히려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는 것 보다 서로 잘아는 사이인 여인을 찾아가 사랑을 얻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판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중학교 졸업앨범을 뒤져 찾아낸 주소로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