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 2편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참으로 단아하다.
그러면서도 인생의 쓴 맛을 다 알아버린 노인네의 주름처럼 힘든 세파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난다.

다만,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꾹꾹 눌러 담는 것이 허진호식 멜로의 특징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앞둔 청년이 소리 죽여 울듯, '봄날은 간다'에서 배신의 아픔을 흐르는 바람결에 두 팔 벌려 털어내는 청년의 평온한 얼굴처럼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한 번쯤 술주정을 하며 주변사람들을 괴롭힐 만도 한데, 떠나간 여인의 뺨을 갈겨줄 만도 한데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러지 않는다.
바로 표정을 알 수 없는 고양이의 단아함 같은 점이 허진호 영화의 매력이요, 미덕이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세 번째 작품 '외출'(2005년)은 그의 미덕이 실종됐다.
남편과 아내가 바람을 피우다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뒤 마주치게 된 남녀는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복수를 서로 바람을 피우는 불륜으로 대신한다.

상황 설정이 파격이다 보니 해법도 충격적이다.
예전처럼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다스리는 허진호식 멜로 스타일은 그저 황당한 상황을 눈처럼 허둥지둥 덮어 끝내기 위한 껍데기가 돼버렸다.

그래서 영화는 전작들과 달리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한 채 단조로운 작품이 돼버렸다.
결국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허 감독이 굳이 흔치 않은 상황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가는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평범한 화질이다.
일부 장면에서 간간히 스크래치가 보이는 것이 흠.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전체적으로 서라운드 효과보다 대사 전달에 치중한다.
2장으로 구성된 만큼 부록으로 감독과 촬영감독의 음성해설, 제작과정 영상 등이 들어있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아내와 남편이 서로 바람을 피우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황당한 일을 겪는다.

남편은 의식불명인 아내에게 말한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니?"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다. 솔직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내의 사고보다 외도 때문에 속앓이를 한다. 배용준은 멀쩡한 상태로 연기하기 힘들어 실제로 술을 많이 마시고 촬영을 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장화, 홍련' 등 이모개 촬영감독의 영상은 밀레의 '만종'처럼 인물이 들어선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겨울바다의 쨍한 느낌이 묻어난다. 삼척에서 촬영.

두 사람은 복수하듯 서로를 사랑한다. 삼척에서 촬영한 장면. 음악도 훌륭했는데, '형사' 등의 음악을 담당한 조성우 음악감독이 맡았다.

사랑이 가져다준 번민 때문에 침대맡 스탠드 조명을 단계적으로 밝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허진호는 서로의 일탈에 금을 그어놓지 않는다. 어찌 보면 육욕은 시작일 수 있다.

영어제목 4월의 눈처럼 영화는 봄날 내리는 눈 속에 사연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