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

'주먹이 운다'(2005년)는 한 단계 더 발전한 류승완 감독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인생막장의 불우한 두 인생이 권투에 희망을 걸고 맞부딪치는 내용은 진부할 수도 있지만 실화가 주는 진중함과 극적인 대결이 볼 만하다.

특히 류 감독은 스포츠의 긴장감을 씨줄 날줄처럼 견고하게 엮어서 탄탄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여기에 최민식, 류승범 두 배우의 야수 같은 연기가 불꽃을 튀긴다.

다만 블리치 바이 패스와 개각도 촬영 등 너무 많이 쓰인 영상기교는 지나치게 멋을 부렸다는 느낌이 든다.
어차피 영화는 광학기술의 산물인 만큼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영상기교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요란한 포장지 때문에 정작 알맹이를 못 보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다.

2.3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과 음향 모두 훌륭하다.
중경과 원경은 우리 영화 특유의 고질적인 샤프니스 저하가 나타나지만 클로즈업 화면은 볼 만하다.

DTS를 지원하는 음향도 서라운드 효과가 탁월하다.
후방 스피커의 활용도가 높으며 인공적인 타격음을 강조하지 않아 효과음들이 자연스럽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영화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최태식(최민식). 북경아시안게임 복싱 은메달리스트인 그는 사업실패 후 먹고살기 위해 길거리에서 돈 받고 매 맞는 일을 한다.

태식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주니어 라이트급 권투선수로 활동한 하레루야 아키라의 실화다. 아키라는 사업 실패로 도쿄 신주쿠에서 매 맞는 일을 해 먹고살았으며 현재 이삿짐센터 직원이다. 그의 이야기는 2000년 MBC 화제집중에 방송돼 국내에 알려졌다.

또 다른 한축을 맡은 상환(류승범).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도둑질, 깡패짓으로 먹고 산다.

상환은 서철이라는 실존 인물이 모델이다. 1998년 폭행사건에 연루돼 천안교도소에 수감된 서철은 거기서 권투를 배워 2000년 전국체전 복싱부문 헤비급 은메달을 따내 화제가 됐다. 2003년 모범수로 가석방된 서철은 그해 10월 이종격투기 선수로 전환했다. 서철 이야기도 2001년 SBS 휴먼 TV에 소개됐다.

경찰과 상환의 추적 장면에 쓰인 개각도 촬영. 개각도 촬영은 물방을 하나하나까지 강조되는 점이 특징.

실제 천안소년교도소에서 촬영.

상환이 싸움 상대의 귀를 물어뜯어 씹어먹는 장면은 실제 천안소년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실제 일화에서는 귀가 아닌 어깨살을 물어뜯어 씹어먹었다.

필름 현상 시 필름에 묻어있는 은입자를 씻어내지 않는 블리치 바이 패스는 콘트라스트를 강조하고 채도를 떨어뜨리는 특징이 있다. '친구'에서 처음 쓰인 이 기법은 거친 질감을 강조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반장 역을 맡은 구본웅은 원래 올레그 인 드라이브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다. 실제 교도소에서는 반장이 아닌 '몸빵'이라는 용어를 쓰나 교도소 측에서 은어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주문해 반장으로 고쳤다.

류감독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 현란한 조명 사이로 불빛을 받으며 올라오는 증기와 어둠 속에 묻혀있는 두 인물의 모습이 묘하게 감성을 자극한다.

상환이 화장실에 숨어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먹는 장면. 남자들은 군대 훈련소 시절이 생각나는 그림이다. 실제 천안소년교도소의 화장실 모습이다. 자해를 막기 위해 뚫려있다.

최민식의 펀치드렁크 증세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를 의식하지만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장치다.

보면서 코 끝이 찡했던 장면. 거칠고 야수 같은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정말 아파 보였다.

막판 두 사람의 대결은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실제 주먹을 주고받았다.

막판 대결은 다양한 앵글이 특징. 이를 위해 류감독은 3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며 촬영.

마지막 6라운드가 볼 만하다. 이 장면에는 뉴질랜드 민요 '포카레카레나'가 흐른다. 이 노래는 우리들에게 '연가'로 잘 알려져 있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 목소리로 흐르는 '포카레카레나'는 전투에 나간 남편을 아내가 그리워하는 내용의 마오이족 노래다.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까지 모두 봐야 한다. 그래야 어어부밴드가 부르는 처절한 '행복의 나라로'를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