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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파리의 영광과 비극, 노트르담과 콩시에르쥬리

울프팩 2015. 10. 2. 22:46

강 하나를 두고 파리의 영광과 비극이 마주 보는 곳이 있다.

콩시에르쥬리와 노트르담 성당이다.

 

센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기분 탓인 지 모르겠지만 왠지 어두운 느낌이 드는 건물이 있다.

바로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쓰여 비극적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콩시에르쥬리(La Conciergerie)다.

 

[센 강변에 자리잡은 콩시에르쥬리]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밝은 노란색 건물인 이 곳에서 프랑스 혁명 때 목이 잘린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가 마지막 며칠을 보냈다.

1789년 7월14일 시작된 프랑스 혁명으로 실각한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두 자녀는 1792년 혁명평의회에서 나라에 해를 끼쳤다는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 독방에 각각 갇혔다.

 

이듬해 1월21일, 루이 16세는 파리 콩코드 광장에 끌려 나가 단두대에서 처형 당했다.

남편의 죽음에 상심한 왕비는 밥도 먹지 않고 슬퍼하다가 급기야 피를 쏟았다.

 

폐렴 등 각종 병까지 걸려 고생하던 마리는 1793년 8월 콩시에르쥬리로 이감됐다.

죄수번호 280번.

 

[센강 위를 지나는 30개 다리 중에서 꽤 유명한 예술의 다리인 퐁데자르교. 사랑의 자물쇠를 너무 많이 달아 난간이 무너진 곳이다. 무너진 난간 대신 그림판이 자리잡고 있다.]

 

마리의 처리를 놓고 국민평의회는 고심했다.

일부는 사형을 주장했고 일부는 전쟁 때 마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끌려간 프랑스군 포로들과 교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 사이 왕을 따르던 옛 신하들은 마리를 탈출 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마리가 거부했다.

결국 마리는 10월14일 열린 재판에서 아들과 근친상간을 하고 오스트리아로 보물을 빼돌렸다는 반역죄 혐의를 적용했다.

 

[센강은 석양이 질 때 참으로 아름답다. 왼편에 보이는 콩시에르쥬리는 아픈 역사를 지닌 건물이지만 이 순간 만큼은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마리는 마지막 해명을 하는 자리에서 청중들에게 아들과 근친상간에 대해 "프랑스의 모든 어머니를 모독하는 저 말을 믿느냐"고 항변하며 이를 부인했다.

오히려 마리의 마지막 호소가 청중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자 당황한 국민평의회는 서둘러 사형선고를  내렸다.

 

다시 콩시에르쥬리에 갇힌 마리는 다른 감옥에 수감된 시누이 엘리자베스에게 유서를 썼다.

그는 유서에서 아이들 앞으로 "우리의 죽음에 대해 절대 복수하지 말라"며 "저들이 우리 가족에게 저지른 모든 악행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겼다.

 

[보행자 전용인 퐁데자르교는 1801~1804년 건설됐다. 2008년부터 사람들이 달기 시작한 사랑의 자물쇠가 너무 늘어나 2014년 6월 급기야 무려 100만개, 총 45톤에 이르는 자물쇠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난간이 무너졌다. 파리시는 올해 말쯤 투명 플라스틱 난간으로 바꿀 예정이다.]

 

그날 마리는 끌려나가 삭발을 당했고 이후 남편이 죽은 콩코드 광장에서 마찬가지로 목이 잘렸다.

마리가 남긴 유서는 엘리자베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역시 유서를 받기 전에 처형당했고 마리의 아들 샤를도 이듬해 옥사했다.

딸 마리 테레사는 오스트리아에 잡혔던 프랑스군 포로들과 교환돼 오스트리아로 떠나갔다.

 

[유명한 퐁네프 다리. 센 강 다리 가운데 400년 역사를 지닌 가장 오래된 다리다. 다리 중간 중간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멀리 보이는 말탄 동상의 주인공은 앙리 4세다.]

 

아픈 역사를 지닌 콩시에르쥬리는 필리프 4세에가 1284년부터 1314년까지 건축한 파리 최초의 궁이다.

그러나 1391년부터 감옥으로 쓰였고, 프랑스 혁명 이후 처형 당할 사람들이 대기하는 장소가 됐다.

 

1793년부터 1795년까지 2,600명이 콩시에르쥬리에 갇혀 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당통과 혁명 기간 공포정치를 이끈 로베스피에르도 이곳에 수감됐다가 처형됐다.

 

프랑스 정부는 1914년부터 감옥 사용을 중단하고 국립 역사기념관으로 바꿔 관광객들에게 개방했다.

건물 일부는 지금도 파리 법원으로 쓰이고 있다.

 

[노트르담 성당 앞쪽에 우뚝 선 샤를마뉴 대제. 주변에 그를 따르던 기사들이 호위해 서 있다.]

 

콩시에르쥬리 앞에서 다리를 건너 파리가 시작된 시테섬으로 들어가면 노트르담 성당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노트르담 성당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성당 앞쪽 광장 한 켠에 위치한 말을 타고 있는 왕의 동상이다.

 

온통 푸르게 녹슨 이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중세 유럽을 연 샤를마뉴 대제, 즉 독일식 이름 카를 대제다.

영어로 표기하면 찰스 대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에 '공포의 샤를'로도 언급된 샤를마뉴 대제는 수 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넓혔다.

이탈리아와 지금의 스페인인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지금의 중부유럽을 그의 발 아래 두었으니 사실상 유럽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한 셈이다.

 

물론 그의 모든 정복전쟁이 성공한 것은 아니어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거센 저항에 부딪쳐 서사시 '롤랑의 노래'의 주인공인 기사 롤랑이 전사했다.

바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성 블라호 성당 앞에 서있는 올란도 석주의 주인공인 롤랑이다.

 

[시테섬 한 복판에 위치한 노트르담 성당.]

 

그런데 정작 중요한 샤를마뉴 대제의 업적은 영토 확장보다 황제권의 확립에 있다.

당시 교황 레오 3세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 제국이 호락호락 하지 않자 서유럽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신의 이름으로 샤를마뉴 대제에게 황제의 왕관을 씌워 주었다.

 

교황 3세는 신을 대신해 샤를마뉴 대제에게 세속의 통치권을 주었고, 대신 샤를마뉴 대제는 교황의 신성한 교권을 보호하기로 했다.

교권과 타협해 황제가 된 샤를마뉴 대제는 휘하 귀족들에게 맡긴 봉토를 순례하며 47년간 제위에 머물렀고, 그가 봉토에서 공물을 받는 방식에서 봉건제도가 자리잡으며 중세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됐고 이후 유럽은 다시 통일되지 않았다.

샤를마뉴 대제의 동상 뒤로 그가 손잡았던 교권의 상징인 노트르담 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파리시는 휴가철이면 휴가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센 강 한쪽에 인공 해변을 만든다.]

 

프랑스어로 '우리의 귀부인'이란 뜻의 노트르담은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1163년 건설을 시작한 이 성당은 무려 170년이 지난 1330년에 완공됐다.

 

빅토르 위고의 유명 소설 '노트르담의 곱추'와 리카르도 꼬치안테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로 널리 알려진 이 성당은 길게 벌려선 플라잉 버트레스와 삐죽삐죽한 첨탑, 무서운 가고일 등이 늘어선 고딕건축 양식으로 우선 규모에서 압도한다.

최후의 심판을 아로 새긴 육중한 청동 문짝과 사도들의 모습에서 왠지 위압감이 느껴진다.

 

천국과 지옥행을 심판하는 이 문 앞에서 중세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면죄부를 팔았다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13세기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된 장미 창이 있다.

 

둥근 원형의 이 장미창은 지름이 13m로 유럽에서 가장 큰 장미창이다.

내부에는 파리의 많은 성당들이 그렇듯 성모 마리아와 성녀 잔다르크의 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