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장만옥 14

첨밀밀 (블루레이)

진가신 감독의 '첨밀밀'(甛蜜蜜, 1996년)은 홍콩 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영화다. 이전까지 홍콩영화라면 '영웅본색' 같은 홍콩느와르나 '취권' '외팔이' 시리즈 같은 무협물을 우선 떠올렸다. 그러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홍콩영화도 잘 만든 드라마로 승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986년부터 1996년까지 10년 동안 홍콩과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이 작품은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다뤘다. 개방화 물결이 밀려든 중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 남자가 우연히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남자에게는 중국 본토에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고, 홍콩서 만난 또다른 여인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둘의..

프로젝트A 2(블루레이)

성룡이 주연 감독한 액션활극은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성룡이 얼마나 기발한 몸 동작으로 경이로운 액션을 선보이는 지가 관건이다. 절묘한 곡예를 보는 것처럼 신들린 듯한 합이 빚어내는 액션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의 경지에 가깝다. 물론 그 이면에는 숱한 부상과 고통의 눈물이 얼룩져 있지만, 이를 알 길 없는 관객들은 마냥 즐겁고 신날 뿐이다. 이것이 곧 성룡의 액션과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다. 어찌보면 애크로배틱 코미디의 선조 격인 찰리 채플린이 남긴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성룡이 주연 감독한 '프로젝트A 2'(Project A II, 1987년)도 마찬가지다. 전편에서 기발한 액션으로 웃음을 자아낸 성룡이 전편의 인기에 힘입어 4년 ..

화양연화 (블루레이)

왕가위 감독의 걸작 '화양연화'(2000년)는 엇갈린 인연과 사랑에 대한 영화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연기한 남과 여는 묘하게도 얽힌 인연 때문에 바람을 피는 불륜의 관계이지만, 그들은 끝까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고집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이상의 진전을 원치 않고 서로의 사랑을 가슴에 묻는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시간이 흘러 서로가 돌아보았을 때 그들의 가슴에 남는 것은 안타까운 그리움과 회한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나간 사랑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를 의미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로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낯선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으로 발전했다가 남남이 된 후 서로가 그리워 하는 감정의 변화를 농..

열혈남아 (블루레이)

어떤 판본을 먼저 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980년대 후반 대학 시절에 처음 본 왕가위 감독의 걸작 '열혈남아'(1987년, http://wolfpack.tistory.com/entry/열혈남아-골든-콜렉션)는 왕걸과 엽환의 노래 '汝是我胸口永遠的通'(너를 보낸 내 가슴은 아프고)로 기억한다. 유덕화가 장만옥의 팔을 낚아 채 공중전화 박스로 뛰어든 뒤, 하얗게 부서지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열렬하게 키스를 나눌 때 흘러 나오던 이 노래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왕걸의 CD를 듣다가 이 노래가 흘러 나오면 가슴이 뛰며 아련함이 밀려 온다. 그만큼 왕걸과 엽환의 노래는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의 장면들과 기막히게 어울렸다. 따라서 두 사람의 노래가 없는 '열혈남아'는 상상할 수도 없고, 극단..

클린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클린'(Clean, 2004년)은 마약에 중독된 여인이 갱생의 길을 걷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주연은 감독의 부인이었던 장만옥이 맡았다. 주인공 여인은 록 가수인 남편과 함께 마약에 빠져 헤매던 중 남편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면서 새로운 삶을 맞게 된다. 뒤늦게 자신의 삶도 돌아보고 버리다시피 한 아들도 생각한다. 결국 그가 있어야 할 자리인 엄마로, 여인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과거와 단절하고 새 삶을 사는 것 뿐이다. 제목인 클린은 결국 여인의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쉬운가. 어느 한 순간 지우개로 지우듯 깨끗이 지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누구나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사야스 감독은 삶의 힘든 변곡점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장만옥은 변화가 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