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에 자리잡은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잇따라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살인이 벌어진 장소들은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온통 피가 튀어 피칠갑이고, 난자당한 시체들 속에 온 몸이 부스럼으로 덮힌 용의자가 눈을 까뒤집은 채 넋이 나가 있다.
이쯤되면 시작부터 섬뜩한 기운이 보는 이를 휘감아 으스스한 기분에 빠지게 만든다.
이때부터 나홍진 감독과 관객들의 복잡한 두뇌 게임이 시작된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년)은 스릴러와 한국판 오컬트 영화라는 외피를 두른 복잡한 심리 영화다.
중심 축은 연쇄 살인범을 쫓는 경찰들과 용의자간에 숨바꼭질하듯 벌어지는 추격전이다.
하지만 데뷔작인 '추격자'나 전작인 '황해'처럼 숨막히는 액션이 가미된 추격전은 아니다.
물론 산 속을 누비는 추격장면에서는 '추격전'의 골목 추격 씬 같은 분위기가 나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미지의 존재와 벌어지는 격투는 현실성이 떨어져 오히려 비디오게임 같은 생경함을 느끼게 만든다.
더욱이 이런 부분들은 워낙 할리우드 괴기물에서 많이 봤던 장면들이 떠올라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신들린 사람들의 기괴한 행동과 푸닥거리 장면은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를 연상케 한다.
장소와 등장인물들의 생김, 복색만 다를 뿐이다.
다만 무당을 연기한 황정민의 굿 장면은 실제로 신이 들린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실감나 눈길을 끈다.
그런데 영화의 본질은 사건을 푸는 스릴러와 기괴한 현상이 점철되는 공포물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 시대 소시민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나약한 아버지가 있다.
직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직장인이지만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지만 정작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저 소리 지르고 상대를 위협하고 악당을 물리쳐 줄 슈퍼맨을 찾듯 무당을 찾아갈 뿐이다.
어찌보면 무당을 찾아가는 행위는 신들린 사람을 구하기에 앞서 본인의 피난처를 찾겠다는 아버지의 절박함이 배어 있다.
그런 아버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초월적 존재도 아니고 무당도 아니다.
바로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과 번뇌와 갈등이다.
자기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모두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보니 끊임없이 흔들리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이 과연 얼마나 옳은 판단일까.
나 감독은 이 같은 질문을 무당, 정체불명의 존재, 신부, 경찰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
결국 숨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막판 관객이 맞닥뜨리는 것은 자신들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
마치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듯 주인공을 통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번뇌하는 나약한 인간의 맨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만큼 나 감독이 2년 8개월간 공들여 쓴 시나리오의 구성과 플롯이 치밀하다는 증거다.
더불어 어린 소녀를 연기한 김환희, 무당 역의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3시간 가까운 짧지 않은 상영 시간이지만 이야기가 탄탄해 눈 돌릴 틈 없이 몰두해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추격자'나 '황해' 처럼 관객의 염통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묘미는 떨어진다.
즉, 긴장감이 두 작품에 크게 미치지 못하며 액션과 유머도 많이 부족해 이런 것들이 좀 더 적절하게 뒤섞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