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10번째 영화인 '아가씨'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 다르면서 같은 영화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 같은 복수 3부작에 비하면 잔혹하지 않으면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라는 점이 다르다.
여기에 기존 작품에서는 볼 수 없던 여인네들의 진한 사랑이 펼쳐진다.
영국의 새러 워터스가 쓴 소설 '핑거 스미스'를 각색한 이 작품은 엄청나게 잘 사는 친일파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 여인과 친일파의 처조카딸, 이를 둘러싼 남자들의 음모와 배신이 또아리를 틀고 돌아가는 얘기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지만 이야기가 결코 복잡하지 않아 흥미진진하게 따라갈 수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야기가 업치락 뒤치락하지만 양자 대결의 분명한 선악구도로 나뉘어 헷갈릴 일이 없다.
감독이 그린 작품 속 선과 악의 싸움은 명확하다.
여자는 선이고 남자는 악이다.
시종일관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여기에 소라넷을 옮겨 놓은 듯한 친일파의 서재는 영락없는 현대판 야설 패러디이다.
이를 통해 약자로서 여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캐릭터들에 투영된 듯한 느낌이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볼거리가 많다.
특히 공간을 가득 채우는 훌륭한 미장센과 여인네들이 한바탕 펼치는 뜨거운 육욕의 세계는 생각 이상으로 야해서 깜짝 놀랐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정작 복수 3부작에 등장했던 눈살을 찌푸릴 만한 잔혹한 영상들은 의외로 나오지 않았다.
공들여 만든 친일파의 저택과 서재 등은 화려하고 정교하면서도 깔끔하다.
공간의 화사함이 영상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작품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과감한 노출도 마다 않은 김민희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고 신인 김태리는 단연 돋보였다.
백작 역할을 맡은 하정우는 적절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며 제 몫을 톡톡해 해줬고,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친일파 거부를 연기한 조진웅은 제대로 미움을 불러 일으켰다.
복수 3부작이 박 감독의 본류이자 특기라고 생각한다면 심심할 수 있겠지만, 박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잊고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