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도라 도라'는 제 2 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뒤 성공을 알리는 신호였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은 6척의 항공모함과 35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작전을 지휘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미 해군 항공모함 격멸을 목표로 진주만을 노렸으나 당시 미 항공모함들이 진주만에 머물지 않는 바람에 군함들만 격침시켰다.
나중에 미 항모가 건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소로쿠 제독은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는 유명한 말로 미국과의 전쟁이 힘든 싸움이 될 것을 예고했다.
그런 점에서 진주만 기습은 미국이나 일본 모두에 아픈 상처같은 역사다.
이를 20세기폭스사는 약 2시간 30분에 이르는 장대한 영화 '도라 도라 도라'(Tora! Tora! Tora!, 1970년)로 재구성했다.
이 영화는 진주만을 다룬 영화 중에 가장 사실적이다.
미일 양측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 미국에서는 리차드 플레이셔, 일본에서는 마쓰다 토시오와 후카사쿠 킨지 등 세 명의 감독이 각각 메가폰을 잡고 자국 입장을 연출했다.
축약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실제 역사를 가장 충실하게 다뤘고 꽤나 공들여 공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그만큼 영화적 완성도는 높은 작품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실에 충실한 나머지 다큐멘터리 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흥행에는 실패했다.
흥행 실패의 이면에는 개봉 당시 월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패배한 역사를 보기 싫어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훗날 마이클 베이 감독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진주만'을 철저한 오락영화로 만들었다.
하이틴 로맨스같은 연애담과 CG로 화려하게 구성한 전투 장면을 통해 사실보다 흥미에 충실했고, 무리하게 둘리틀의 도쿄 공습까지 이야기를 늘려 일본에 통쾌한 복수를 가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완성도는 '도라 도라 도라'가 한 수 위다.
역사교과서 같은 진지함과 충실함, 객관적 접근 등이 역사적 사실의 무게를 제대로 전달했다.
1080p 풀HD의 2.35 대 1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극장 개봉판과 일본 장면을 조금 늘린 확장판 등 2가지 버전이 들어 있다.
화질은 약간의 지글거림과 새벽 장면 등에서 어두운 장면의 디테일이 떨어지긴 하지만 샤프니스도 괜찮고 색감도 잘 살아 있어 무난하다.
음향은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으로 음성해설과 다큐멘터리, 제작과정 등이 들어 있다.
음성해설을 제외하고는 한글 자막을 지원한다.
문제는 본편의 자막 번역이다.
해군 중령이나 항공대 지휘관을 부사령관이나 사령관으로 번역하는 등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엉뚱한 오역이 여러 군데 보인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진주만 기습 작전을 입안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제독을 연기한 소 야마무라는 실제 이소로쿠 제독의 사진과 많이 닮았다. 제독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해전에 참전했다가 왼쪽 손가락 2개를 잃었다. 항공력의 우위를 강조하며 전함보다 항모를 중시했던 그는 1943년 필리핀 부겐빌 상공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 도중 미군 전투기에 의해 격추당해 전사했다.
이 영화는 20세기폭스의 대릴 자눅 사장이 제작을 결심했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때 통신병으로 참전했으며 '지상 최대의 작전'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 언론인 라디슬라스 파라고가 쓴 'The Broken Seal'이라는 책의 판권을 사서 영화화를 추진했다.
자눅 사장은 맥아더 장군이 1946년 태평양전쟁사 기록담당자로 지명한 고든 프랜지를 자문으로 기용했다. 프랜지는 진주만 공격을 지휘한 일본 항공공격대의 후치다 중령과 항공작전 입안자인 겐다 미노루 중령을 직접 인터뷰했다.
폭스사는 양측 입장을 객관적으료 묘사하기 위해 미국쪽 연출은 나중에 '코난'을 만든 리차드 플레이셔 감독을 기용했고, 일본측은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기용했다.
하와이는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빼앗은 뒤 미국 서해안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 때문에 진주만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특히 수심이 얕아 어뢰공격이 힘든 잇점이 있었다.
일본군의 암호를 도청한 미군의 암호해독기 매직 시스템. 이 때문에 전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사전에 알면서 참전 동기를 만들기 위해 모른척 했다는 설이 돌았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도발은 사전 감지했지만 진주만이 공격을 받을 것이란 사실은 몰랐다.
미 군함들이 진주만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는 주장이 있지만, 군사학자들은 오히려 군함들이 진주만에 모여 있어서 피해가 적었다고 강조한다. 수심이 깊은 태평양이었다면 피해를 입은 군함들이 모두 해저로 침몰했겠지만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 격침된 군함도 건져올려 수리한 뒤 다시 사용했다는 것.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실물을 사용했지만 일본 제로센은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미군의 AT-6 전투기를 개조해 사용했다. 개전 초기 미군 전투기보다 우수했던 일본군의 제로센은 AT-6 디자인을 참조해 만들었다.
대부분의 군함은 최대 15미터 크기의 미니어처였고, 대폭발을 일으킨 전함 아리조나호만 실물 크기의 복제품을 만들었다. 일본 함대의 기함이었던 나가토도 201m 크기의 복제품이었고, 일본 항모 아카기의 비행갑판도 규슈에 똑같이 만들어 놓고 촬영.
미국측은 제작비를 아끼려고 스타급 배우들을 기용하지 않았다. '600만불의 사나이'에서 오스카 역으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앤더슨도 출연.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일본군 역할에 배우대신 자신의 친구나 기업인들을 캐스팅했다. 폭스사에서는 그가 차기 작품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기업인 등을 출연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했던 이소로쿠는 1940년 11월 영국 해군이 수심이 얕은 타란토항에서 이탈리아 해군 군함을 침몰시킨 것을 보고 진주만 작전을 입안했다. 일본 해군은 수심이 얕은 진주만 공격을 위해 안정 날개를 부착한 특수 어뢰를 제작했다.
구로자와 아키라는 살해 위협을 받았다며 경호원을 요구하는 등 이상한 행동의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다가 3주 동안 6분 분량 밖에 촬영하지 못해 2명의 다른 일본 감독으로 교체됐다. 제작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일본 스파이였던 요시카와 다케오는 영사로 위장해 하와이에서 진주만 감시활동을 했다.
당시 22세의 민간 항공기 교관이었던 코넬리아 포트는 진주만 공습에 나선 일본기에 둘러싸였으나 재빨리 달아나 안전하게 착륙했다.
이 장면은 연출이 아니라 사고를 그대로 촬영했다. 활주로에 서 있던 전투기들은 날 수 없는 모형으로 폭약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케이블에 연결돼 활주로를 달리던 P-40 전투기가 갑자기 한쪽 날개가 들리며 격납고 쪽으로 방향을 틀자, 제작진이 폭파 스위치를 눌러 강제로 폭파시켰다.
달리던 전투기가 서있던 다른 전투기들을 덮쳐 폭발하는 장면도 사고였다. 달아나는 군인들은 실제로 놀라서 살기위해 달아나는 것.
전함 오클라호마는 측면에 어뢰를 맞아 갈라졌고, 전함 아리조나는 사흘 동안 불탔다. 특히 진주만 공습으로 사망한 2,400명 중 1,100명이 아리조나 수병들이었다.
미국이 석유 주석 등의 원자재를 일본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금수조치를 취하자 일본은 살아남기 위해 진주만 기습을 벌였다. 나구모 중장이 1,2차 공습에 이어 3차 공습을 취소한 것은 패착이다.
폭스사는 촬영에 쓰인 군용 자산에 대해 병사들 급료와 연료비, 식비 등 비용을 지불했다.
이 작품은 일본이 진주만 기습에 사용한 비용보다 25배 많은 2,300만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다. '클레오파트라' 다음으로 많은 비용이 든 영화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대성공했다.
이 영화 때문에 다큐드라마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제작자는 실제 항공작전을 기안한 겐다 미노루 중령을 기술자문으로 기용했다가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사고도 많이 났다. 폭풍우 치는 날 항공기를 옮기기 위해 이륙했다가 추락사했고, 공중전 장면 촬영 중에도 추락해 조종사가 즉사했다.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진주만 기습 당시 제 1 항공함대 사령관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4척의 항모를 모두 잃고 쇠락한 뒤 1944년 7월 패전 기운이 짙어지자 자결했다.
제 1 항공전대의 어뢰공격 전술을 개발한 겐다 미노루 중령은 나구모 중장의 항공참모로 항모 아카기에 머물렀으며, 손꼽히는 뇌격기 에이스였던 후치다 미쓰오 중령은 직접 1차 공격을 지휘했다. 후치다는 전후 목사가 됐으며 1976년 사망했다.
일본측을 미화했다는 비난을 들으며 흥행 실패한 뒤 대릴 자눅 사장은 아들과 불화가 일어 아들을 해임했다. 그러나 이사회에서 사퇴요구를 받고 71년에 물러 나면서 폭스사의 대릴 자눅 시대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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