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유명한 걸작 '라쇼몽'(1950년)은 처음부터 패를 드러내 놓고 시작한다.
폐허가 된 거대한 문(羅生門) 아래에서 요란하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던 나무꾼이 내뱉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한마디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숲 속에서 발견된 사무라이의 시체.
시체를 발견한 나무꾼, 사무라이의 아내, 사무라이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도둑, 여기에 무당의 입을 빌려 찾아온 사무라이의 영혼까지 네 사람은 같은 사건을 제각기 다르게 설명한다.
문제는 각기 다른 주장이 모두 그럴 법하다는 것.
결국 요란한 말속에 가려진 진실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된다.
하지만 네 사람의 주장 모두에 참과 거짓이 섞여 있다 보니 진실을 찾기란 결코 간단치 않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이 점 때문에 진중권은 그의 저서 '이매진'에서 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전했다.
진리란 가려진 것이 드러나는 탈은폐여서 진리가 궁극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진실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불신이다.
아키라 감독은 참과 거짓이 뒤섞여 서로 믿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극 중 승려의 입을 빌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니, 이승이 곧 지옥"이라는 메시지로 함축한다.
실제로 아키라 감독은 자서전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에게 정직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미화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썼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는 "진실로 선한 사람이 있는 줄 아는가. 선함도 가식"이라며 인간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아키라 감독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아기를 나무꾼이 데려가면서 그는 다시 인간에 대한 믿음을 키운다.
아키라 감독은 이 과정을 현재와 과거가 엇갈리는 교차 편집으로 긴장감 있게 살렸다.
서로 교차하는 플래시백은 동일한 이야기가 다른 관점에서 되풀이되면서 마치 옴니버스처럼 펼쳐진다.
여기에 번뜩이는 칼날, 얼굴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 기왓장과 현판 등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영상들이 몽타주 기법으로 스크린을 수놓는다.
더불어 도둑을 연기한 미후네 도시로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과 쿄 마치코의 광적인 연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참고로, 아키라 감독은 왜 인간에 대한 불신을 가졌을까.
이 영화를 만들기 2년 전인 1948년, 맥아더의 미 군정은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몰아내기 위해 대대적 좌파 탄압에 나선다.
이때 도호영화사에 몸담고 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야마모토 사쓰오 감독과 함께 영화계 좌파 척결에 반대하는 유명한 '도호 쟁의'에 참가했다가 쫓겨났다.
이후 아키라 감독은 다시 도호에 발을 딛지 못했고, 한동안 작품 활동에 지장을 받는 등 고생했다.
영화가 얘기하는 진실과 거짓의 혼재 및 사람에 대한 불신 속에는 아마도 아키라 감독의 이 같은 개인적 경험도 녹아 있을 것이다.
4 대 3 풀 스크린의 흑백 영상인 DVD 타이틀은 새삼 화질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무려 62년 전 작품인 만큼 화질은 말하기 민망할 만큼 좋지 않다.
음향은 돌비 디지털 모노를 지원하는데 대사조차 분명하게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부록은 전혀 없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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