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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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

울프팩 2011. 12. 26. 00:50
이 영화, 참 기이하다.
어디서나 봄직한 일상의 소소함 속에 생각할 거리를 던졌던 게 그동안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라면 그의 12번째 영화인 '북촌방향'(2011년)은 전작들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조각그림처럼 흩어진 평이한 삶의 단면들이 같은 점이라면, 뒤틀린 시공간은 다른 점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힘들다.

선배(김상중)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영화감독(유준상)이 북촌이라는 동네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부대끼는 내용은 언뜻보면 하루 동안 이야기 같으면서 며칠 사이 벌어진 일 같기도 하다.
그만큼 영화 속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보니 시간의 배열도 혼란스러워 인과관계도 분명치 않다.
즉, 귀퉁이가 닳아서 두루뭉실한 퍼즐 조각처럼 어떤 샷을 어느 시점에 끼워넣어도 이야기가 맞을 것 같다.

도대체 홍 감독은 왜 이리 기이한 방법을 택했을까.
해답은 영화 속 대사에 있었다.

주인공 성준(유준상)은 보람(송선미)이 우연히 영화계 사람들을 만난 얘기를 꺼내자 이렇게 답한다.
"이유없는 일들이 모여서 우리의 삶을 이룬다. 우연이라는 불규칙한 점들이 모여 삶을 이루지만, 사람들은 이 점들을 억지로 갖다 붙여서 이유라고 생각을 한다."

비틀린 시공간과 파편처럼 혼재한 이야기도 모두 언뜻보면 영화의 기본을 무시한 엉터리 같지만 우연으로 가득찬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감독의 메시지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익숙한 일상을 통해 낯설음을 느끼게 만드는 기이한 영화다.

어찌보면 홍 감독 영화 중에 가장 실험적인 작품일 수도 있다.

16 대 9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케이스에 써놓은 'HD리마스터 고화질'이라는 문구가 무색할 정도로 화질이 그저 그렇다.
블루레이 영상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윤곽선의 계단 현상이 영 눈에 거슬리고 디테일도 떨어진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2.0 채널을 지원한다.
부록으로 기자간담회와 초대시사회 현장, 배우 인터뷰 등이 들어 있다.

<파워DVD로 순간포착한 DVD 타이틀 장면들>
이 영화는 모든 장면을 서울 인사동 북촌 마을에서 찍었다.
'오 수정'에 이어 홍 감독의 두 번째 흑백 영화. 처음부터 흑백은 아니었고, 편집 과정에서 홍 감독이 흑백으로 바꿨다.
홍 감독이 흑백으로 바꾼 이유는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과 반복되는 일상에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
홍 감독은 현장에서 대본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A4 용지 3,4매 분량의 대본을 그날 그날 나눠줬단다.
캡처 샷만 보면 도대체 무슨 영화가 술집에 앉아있는 장면 밖에 없을까 의아하다. 언제나 그렇듯 홍 감독의 전매특허인 옆모습의 바스트샷 아니면 술상을 마주한 군상들의 대화 장면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홍 감독 특유의 아이러니컬한 반어법적 대사와 뒤틀린 상황이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김보경은 술집 주인과 과거 옛 애인 등 1인2역을 했다.
김보경은 정면과 옆얼굴이 참 다르게 보인다. 촬영 각도에 따라 느낌이 다양한 팔색조 같은 여배우다.
그리고 느닷없는 고현정과의 조우. 역시 우연이라는 점 중에 하나다. 촬영은 김형구 촬영감독이 맡았다.
그리고 주인공이 카메라 속의 또다른 카메라 앞에서 잔뜩 경직된 채 영화는 느닷없이 막을 내린다. 아무 설명도 없고, 개연성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저 커튼이 떨어지듯 영화는 끝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