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관광의 명소로 떠오른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에 있는 감천문화마을은 1950년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됐다.
1945년 30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1951년 84만 명으로 3배 가까이 뛰었다.
결국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 산꼭대기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천마산 옥녀봉 아래 모여 산 것이 지금의 감천마을 효시가 됐다.
시초에는 피란민들과 태극도 신도 4,000여 명이 산비탈에 층층이 판잣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태극도는 대순진리회의 모태가 된 종교로 감천2동에 총본부가 있다.
동네 사람들은 예전처럼 태극도라고 부른다.
마을 이름 감천(甘川)은 물이 달고 좋다는 뜻.
얼핏 들으면 신선놀음 같지만 감천의 삶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미국 비벌리힐스나 트윈픽스처럼 전망 좋은 산꼭대기에 부자들이 살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서 달동네로 올라갔다.도로에서 멀어질수록 학교나 시장이나 일터 모두 다니기 힘들어 집값이 쌌기 때문.
그렇게 형성된 달동네 마을은 좁은 산비탈에 판자로 얼기설기 집을 지으며 제대로 된 포장도로 하나 없이 미로처럼 꾸불거리는 골목을 사이에 둔 채 이마를 맞대고 살았다.
지금도 감천문화마을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실개천처럼 꼬불거리며 아래를 향하는 수많은 미로 같은 골목을 볼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별 보러 가는 계단'이다.
마을 이름 감천만큼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속내를 보면 그렇지 않다.
가파른 언덕길을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아득한 높이에 어지러워 휘청하면서 눈앞에 별이 보여 붙은 이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 플레이트'라는 카페와 '감천문화역'이라는 공예품점 사이로 오르는 계단을 칸칸이 칠해 사진 찍기 좋은 장소가 된 천덕수 계단도 애달픈 사연이 서려 있다.
심한 가뭄으로 사람들이 굶주리며 죽어가자 마을 청년 하나가 제발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우물을 파서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하늘이 덕을 베푼 물이라는 뜻의 천덕수(天德水)라는 이름이 우물에 붙었다.
실제로 계단 꼭대기에 오르면 작은 우물 모형이 하나 있다.
감천마을 옆으로 붙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도 피란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서려 있다.
원래 이곳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산비탈에 조성한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한국전쟁 때 밀려 내려온 피란민들은 마땅한 자재가 없자 무덤의 비석을 가져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땅 임자도 따로 없어서 쫓겨날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렇게 사람이 몰렸던 감천은 부산의 다른 지역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가 1970년대부터 주민이 줄기 시작했다.
1995년 2만여 명이 살았지만 2016년 기준 8,000명으로 줄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65세 이상 노인이고 저소득층이다.
그만큼 감천마을도 고령화가 심각하다.
그렇다고 재개발을 하기에는 경사가 심하고 어려움이 많아 집집마다 색색의 페인트로 칠해 관광자원으로 삼는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했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 예쁜 카페와 상점들이 들어섰고 2019년 308만 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기 전에는 버스를 대절해 찾아올 정도로 외국인들이 몰렸다.
2019년 한국아세안 정상회담 때 방한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감천마을을 찾았다.
감천문화마을을 가려면 문화마을 표시가 높다랗게 붙은 입구까지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는 게 좋다.
언덕 아래부터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워낙 경사가 심해 마을입구에 다다르기 전에 지친다.
마을 입구에서 계속 언덕을 오르며 구경을 하려면 처음부터 힘을 뺄 필요가 없다.
오르다 보면 사진을 찍는 몇 군데 포인트가 있다.
나인주 작가가 2016년에 만든 어린 왕자 조형물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곳과 등대 포토존, 천덕수 계단, 별 보러 가는 계단 등이다.
감천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사진을 찍기 가장 좋은 곳은 동네 입구 쪽에 있는 공예품점 '더 홈'이다.
한옥 대문을 연상케 하는 옆에 '우리 집'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곳이다.
감천문화마을 입구에서 왼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