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71년)는 오랫동안 국내에서 금단의 영화로 묶여 볼 수 없었다.
이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2005년 한 장면도 자르거나 가리지 않고 무삭제 무암전으로 국내 출시된 DVD 타이틀 덕분이었다.
세간에는 이 영화가 헤어누드와 성기 노출 등 강도 높은 폭력장면이 많이 나와 상영 금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보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헤어누드와 폭력보다는 체제 비판과 종교에 대한 비아냥이 더 강하다.
내용은 보호관찰 중인 소년 알렉스(말콤 맥도웰 Malcolm McDowell)의 교화 과정을 다뤘다.
알렉스는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노숙자를 두들겨 패거나 가정집에 침입해 여인을 범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벌인다.
급기야 살인까지 벌이면서 어린 나이에 감옥에 갇힌 알렉스는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나가기 위해 정부에서 시험 중인 루도비코 프로그램에 자원한다.
루도비코 프로그램은 한마디로 강제로 사람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정신개조 실험이다.
억지로 폭력적인 영상을 되풀이해 보여줘 폭력 행위에 대해 염증과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영상을 보여주면서 배경음악으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트는 바람에 이 음악을 들으면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스의 범죄 피해자들이 급기야 베토벤 음악으로 알렉스를 고문한다.
결국 음악 고문을 견디지 못한 알렉스는 자살을 시도하면서 정부의 인간 개조 프로그램은 종말을 맞게 된다.
큐브릭 감독은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며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에 천착했다.
알렉스의 과격한 폭력도 문제지만 악당들의 본성을 바꾸기 위한 정부의 인간 개조 프로그램 또한 폭력적이다.
큐브릭 감독은 두 가지 폭력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문제라고 본 것이다.
큐브릭 감독은 알렉스의 개조 프로그램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을 통해 폭력적 방법으로 폭력을 근절하는 것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함무라비 법전 식의 대응이 효과적일지 의문을 품은 것이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결국 인간이 만든 법규와 제도 또한 또 다른 폭력인 셈이다.
여기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품고 있는 큐브릭의 생각도 작용했다.
실제로 큐브릭 감독은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는 생각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원시 인류가 뼈다귀를 휘두르는 장면처럼 인간의 본성은 폭력적이라고 봤다.
그가 만든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샤이닝' '배리 린든' '풀 메탈 자켓'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 일련의 작품들은 내재된 폭력성을 강하게 드러내거나 선한 본성을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 또는 조롱을 당하며 비극적 최후를 맞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인간 개조 실험의 실패를 통해 과연 폭력성을 바꿀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큐브릭 감독은 이를 아름답고 전위적이며 펑키한 영상을 통해 역설적 방법으로 묻는다.
잔혹하고 충격적인 영상 위로 시종일관 흐르는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과 화려한 색감,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의 각종 소품들을 보면 한 편의 펑크 시를 보는 것 같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정치적이다.
"아름다운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구역질이 나야 한다니, 이건 죄악이야!"
세뇌를 당하며 주인공이 외치는 이 한마디에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함축돼 있다.
국내 출시된 4K 타이틀은 오로지 4K 디스크 1장만 들어 있다.
2160p UHD의 1.66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4K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그레인 질감이 두드러진 가운데 샤프니스가 그렇게 높지 않다.
반면 클로즈업의 디테일이 좋고 큐브릭이 의도한 조명 덕분에 빛이 나르고 바랜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색감이 잘 살아 있다.
무엇보다 50년 된 작품인데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디지털 리마스터링 된 것을 보면 새삼 감탄하게 된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괜찮다.
원래 극장의 오디오 시스템을 믿지 못한 큐브릭 감독은 이 작품의 음향을 가장 문제가 적은 모노로 제작했다.
이를 블루레이로 만들며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확장했는데 배경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공감각을 느끼게 한다.
부록으로 말콤 맥도웰과 영화학자 닉 레드맨의 해설이 들어 있으나 안타깝게도 한글 자막을 지원하지 않는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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