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시계태엽 오렌지(4K)

울프팩 2021. 9. 26. 13:23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71년)는 오랫동안 국내에서 금단의 영화로 묶여 볼 수 없었다.
이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2005년 한 장면도 자르거나 가리지 않고 무삭제 무암전으로 국내 출시된 DVD 타이틀 덕분이었다.

세간에는 이 영화가 헤어누드와 성기 노출 등 강도 높은 폭력장면이 많이 나와 상영 금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보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헤어누드와 폭력보다는 체제 비판과 종교에 대한 비아냥이 더 강하다.

내용은 보호관찰 중인 소년 알렉스(말콤 맥도웰 Malcolm McDowell)의 교화 과정을 다뤘다.
알렉스는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노숙자를 두들겨 패거나 가정집에 침입해 여인을 범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벌인다.

급기야 살인까지 벌이면서 어린 나이에 감옥에 갇힌 알렉스는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나가기 위해 정부에서 시험 중인 루도비코 프로그램에 자원한다.
루도비코 프로그램은 한마디로 강제로 사람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정신개조 실험이다.

억지로 폭력적인 영상을 되풀이해 보여줘 폭력 행위에 대해 염증과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영상을 보여주면서 배경음악으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트는 바람에 이 음악을 들으면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스의 범죄 피해자들이 급기야 베토벤 음악으로 알렉스를 고문한다.

결국 음악 고문을 견디지 못한 알렉스는 자살을 시도하면서 정부의 인간 개조 프로그램은 종말을 맞게 된다.
큐브릭 감독은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며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에 천착했다.

알렉스의 과격한 폭력도 문제지만 악당들의 본성을 바꾸기 위한 정부의 인간 개조 프로그램 또한 폭력적이다.
큐브릭 감독은 두 가지 폭력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문제라고 본 것이다.

큐브릭 감독은 알렉스의 개조 프로그램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을 통해 폭력적 방법으로 폭력을 근절하는 것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함무라비 법전 식의 대응이 효과적일지 의문을 품은 것이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결국 인간이 만든 법규와 제도 또한 또 다른 폭력인 셈이다.
여기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품고 있는 큐브릭의 생각도 작용했다.

실제로 큐브릭 감독은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는 생각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원시 인류가 뼈다귀를 휘두르는 장면처럼 인간의 본성은 폭력적이라고 봤다.

그가 만든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샤이닝' '배리 린든' '풀 메탈 자켓'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 일련의 작품들은 내재된 폭력성을 강하게 드러내거나 선한 본성을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 또는 조롱을 당하며 비극적 최후를 맞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인간 개조 실험의 실패를 통해 과연 폭력성을 바꿀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큐브릭 감독은 이를 아름답고 전위적이며 펑키한 영상을 통해 역설적 방법으로 묻는다.

잔혹하고 충격적인 영상 위로 시종일관 흐르는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과 화려한 색감,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의 각종 소품들을 보면 한 편의 펑크 시를 보는 것 같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정치적이다.

"아름다운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구역질이 나야 한다니, 이건 죄악이야!"
세뇌를 당하며 주인공이 외치는 이 한마디에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함축돼 있다.

국내 출시된 4K 타이틀은 오로지 4K 디스크 1장만 들어 있다.
2160p UHD의 1.66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4K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그레인 질감이 두드러진 가운데 샤프니스가 그렇게 높지 않다.
반면 클로즈업의 디테일이 좋고 큐브릭이 의도한 조명 덕분에 빛이 나르고 바랜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색감이 잘 살아 있다.

무엇보다 50년 된 작품인데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디지털 리마스터링 된 것을 보면 새삼 감탄하게 된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괜찮다.

원래 극장의 오디오 시스템을 믿지 못한 큐브릭 감독은 이 작품의 음향을 가장 문제가 적은 모노로 제작했다.
이를 블루레이로 만들며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확장했는데 배경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공감각을 느끼게 한다.

부록으로 말콤 맥도웰과 영화학자 닉 레드맨의 해설이 들어 있으나 안타깝게도 한글 자막을 지원하지 않는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주인공 알렉스를 연기한 말콤 맥도웰. 큐브릭 감독은 린제이 앤더슨 감독의 '만약'에 주연한 맥도웰을 보고 당시 28세였던 그를 섭외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에서 스타차일드를 만든 조각가 리즈 존스가 코로바 밀크바에 나오는 여성 마케팅을 디자인. 마네킹에서 마약 섞인 우유가 나오는 설정이다.

큐브릭 감독은 앤소니 버지스가 1962년 출간한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화 결심을 했다.

원작자 앤서니 버지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런던에서 4명의 미군 탈영병에게 부인이 강간을 당해 유산한 아픈 경험이 있다. 그는 이 기억을 원작 소설에 반영했다.

작가 부부의 집을 급습해 강간하는 장면에서 알렉스가 진 켈리의 'Singing in the Rain'을 부른다. 이 노래를 택한 이유는 말콤 맥도웰이 유일하게 가사를 끝까지 기억하는 노래였기 때문.
원제의 orange는 사람을 뜻한다. 작가 버제스가 말장난이다. 말레이시아어로 사람은 오랑(ourang)이다. 여기서 오랑우탄이 유래. 버제스는 이를 orange로 슬쩍 바꿔 넣었다. 따라서 풀이하면 시계태엽장치 같은 사람이라는 뜻.

영국에서는 개봉 후 큐브릭과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이 이어졌다. 결국 감독이 영국에서 상영 중지를 결정했다.

이 영화는 개봉 후 몇년 뒤 불어닥친 펑크 열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알렉스 옆에 큐브릭 감독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OST LP가 보인다.

미국에서는 처음에 X등급을 받았다. 큐브릭 감독은 R등급으로 낮추려고 1분 이상 잘라냈다.

버제스는 이 작품의 영화 판권을 가수 믹 재거에게 단돈 500달러에 팔았다. 믹 재거는 알렉스의 동료들을 모두 자신의 밴드 롤링 스톤스 멤버로 채울 생각이었다.
잡지 '룩'에서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일한 큐브릭은 영상에 민감했다. 그는 1.66 대 1로 촬영한 이 작품을 유럽에서 제대로 상영하기 위해 영사용 1.66 대 1 렌즈 283개를 구입해 유럽 극장들에 배포했다. 당시 유럽의 많은 극장들이 1.66 대 1 영사용 렌즈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작품의 블루레이는 큐브릭의 조수였던 레온 비탈리가 감수했다. 큐브릭은 비탈리에게 촬영한 영화 프린트를 수백 번 이상 되풀이해보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 바람에 영화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비탈리가 큐브릭 사후 블루레이 복원에 참여했다.
이 작품에는 인간 본성을 개조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 들어 있다.

로시니의 '경기병 서곡'에 맞춰 두 여인과 한꺼번에 정사를 벌이거나 정신 개조 장면에 베토벤 교항곡 제9번이 쓰이는 등 여러 곳에 클래식이 등장한다.
말콤 맥도웰은 이 장면을 촬영하다가 각막을 다쳐 잠시 앞을 보지 못했다.

세뇌 교육의 결과 알렉스는 폭력과 섹스 앞에서 구토를 하는 비정상적 인간이 된다. 말콤 맥도웰은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을 찍으면서 큐브릭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빨리 내지 않고 여러 번 되풀이 해 찍는 바람에 익사할 뻔했다.

교수가 알렉스의 '싱잉 인 더 레인'을 들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앙각으로 잡은 장면은 '샤이닝'의 잭 니콜슨이 욕실 문 앞에서 부인을 위협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교수의 집에 걸린 그림은 큐브릭의 세번째 부인 크리스티안 할란이 그렸다. 할란은 이 영화가 폭력적이라며 싫어했다. 유대인이었던 큐브릭의 부인 할란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혐오를 다룬 선전 영화 '유대인 쥐스'를 만든 나치 감독 파이트 할란의 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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