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서부극 보는 재미를 가르쳐 준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또 다른 하나는 배우 테렌스 힐이다.
둘 다 정통 서부극에서 비켜 선 스파게티 웨스턴 계열이지만 아메리칸 서부극이 줄 수 없는 재미를 줬다.
어린 시절에는 '하이 눈'의 진지함과 '역마차'의 웅장한 구도보다 오로지 무뚝뚝한 사내들의 현란한 총싸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황야의 무법자' 3부작을 통해 서부극이 얼마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장르인지를 알려줬고, 테렌스 힐은 '튜니티' 시리즈를 통해 서부극이 얼마나 웃기고 신나는 장르인지를 가르쳐줬다.
그런 느낌은 나만 가졌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후 미국 서부극들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와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을 마구 섞은 잡탕밥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황야의 7인' '와일드 번치' '네바다 스미스' 등은 기존의 도덕교과서 같은 정의를 강조하는 서부극과 달리 이면에 보이는 다양한 가치를 비틀어 보게 만드는 힘과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번에 DVD가 나오기 전까지 레오네 감독을 비롯해 자타 공히 레오네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Once Upon A Time In The West, 1968년)의 무삭제판을 국내에서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간채 극장 개봉은 1970년에 했지만 감독이 의도한 무삭제판은 극장은 물론이고 TV 방영 및 비디오 출시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이 작품에 '빨갱이 영화'라는 딱지가 붙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부극에 웬 빨갱이 타령일까 싶지만 실제로 이 영화에는 좌파적 색채가 짙고 그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편집 상영하거나 아예 상영을 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레오네 감독,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공포물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 등 3명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런 조합 자체도 대단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와 비판, 복수의 이야기는 갈채를 보내고 싶을 만큼 훌륭하다.
특히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서정적인 선율, 특히 '질의 테마'는 가슴을 먹먹하고 아련하게 한다.
내용은 레오네 감독의 스파게티 웨스턴이 그렇듯 이름 없는 떠돌이가 어느 마을의 미망인이 가진 이권을 노린 악당과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다.
하지만 레오네 감독과 베르톨루치, 아르젠토 세 사람이 만든 이야기는 결코 그렇고 그런 뻔한 서부극이 아니다.
철도 침탈과 함께 시작된 미국 서부 개척사에 대한 은유와 과도한 영웅주의로 민중의 존재를 가려버리는 미국식 서부극에 대한 풍자가 웅장한 서사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특히 미국 정통 서부극에서 항상 정의의 사나이로 부각하였던 푸른 눈의 백인 스타인 헨리 폰다를 악당으로 둔갑시켜 기존 서부극에 대한 전복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레오네 감독이 주장하는 것은 서부극이란 결코 정의로만 점철된 것이 아닌 피와 폭력의 역사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레오네 감독이 만든 누아르물을 연상케 하는 스타일리시한 영상은 지금 봐도 전위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스산한 풍광을 배경으로 기다란 롱코트를 펄럭이는 사내들의 총격전과 레오네 감독의 장기인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교차하는 영상은 가슴 졸이는 긴장감과 함께 비장미를 최고로 고조시킨다.
여기에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지만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찰스 브론슨의 외모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미모와 어울려 애달픈 감정을 자아낸다.
한마디로 레오네 감독의 연출, 웅장한 이야기, 배우들의 연기와 엔니오 모리코네의 가슴 아픈 음악 등 모든 면에서 만점을 주고 싶을 만큼 훌륭한 걸작이다.
안타깝게도 이토록 훌륭한 걸작인 이 작품의 블루레이는 국내에 출시되지 않았다.
이 같은 걸작이 국내에서도 빨리 블루레이 타이틀로 나왔으면 좋겠다.
미국에서 나온 블루레이 타이틀은 166분가량의 무삭제 리마스터링판과 미국 개봉 당시 편집된 극장판 등 2가지를 동시에 싣고 있다.
무삭제판은 국내 출시된 DVD 타이틀과 같은 내용이나 한글자막이 들어있지 않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필름의 입자감이 느껴지는 영상은 이렇다 할 노이즈가 보이지 않는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뛰어나지 않지만 모리코네의 선율이 공간을 편안하게 감싸는 가운데 총성이 묵직하게 터진다.
부록으로 베르톨루치 감독을 비롯해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까지 참여한 음성해설과 레오네 감독의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충실한 내용의 영상 자료들이 함께 들어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철길 건너편에 홀로 선 찰스 브론슨과 3명의 악당이 대치한 이 장면은 스타일리시 영상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명장면이다. 악당들이 입고 나온 롱코트는 바람에 흩날리며 스산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는 여기저기에 레오네가 영향을 받은 미국 정통 서부극의 흔적이 보인다. 세 악당이 철도역에서 주인공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이 장면은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에서 착안했다. 이 장면의 흑인 배우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 우디 스트로드. 오른쪽 옆에 서 있는 인디언 여인은 우디의 실제 부인이다.
레오네는 총격전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지루할 정도로 유장하게 묘사해 긴장감을 높인 뒤 총격전은 순식간에 후다닥 끝내버린다. 그런 점은 구로자와 아키라와 비슷해 보인다.
주인공인 하모니카를 부는 총잡이로 나온 찰스 브론슨. 그는 이 작품과 프랑스에서 찍은 '빗 속의 방문객'에서 가장 멋있게 나왔다. 원래 레오네 감독은 제임스 코번과 악당 역을 거절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도 주인공 역할을 제의했다.
레오네는 옆모습에서 시작해 돌아들어가며 얼굴 전체를 보여주는 샷을 좋아했다. 이런 방식은 인물에 대한 궁금증과 정체가 드러났을 때 놀라움을 주는 극적 효과를 부각시킨다.
아이까지 죽이는 잔혹한 악당으로 등장한 헨리 폰다. 개봉 당시 사람들은 'OK목장의 결투'의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 등 선한 이미지로 일관해온 폰다가 악역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또한 정의로움으로만 포장된 미국 서부극, 곧 미국 역사를 부정하고 싶었던 레오네 감독의 의도적인 캐스팅이다. 그가 서부극의 악역으로 나온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며 이후 테렌스 힐 주연의 '무숙자'에서도 악역을 맡았다.
레오네 감독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장면.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질)가 역에 도착하는 이 장면에서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엔니오 모리코네의 '질의 테마'가 흐른다.
싸움의 무대가 되는 플렉스톤 마을은 스페인의 알메이라 사막에 건설된 세트다. 실제와 똑같은 마을 세트를 만드느라 '황야의 무법자'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미국 애리조나 사막의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은 이 장면은 존 웨인 주연의 '역마차'와 구도가 너무나 흡사하다. 레오네는 미국 서부극의 느낌을 주기 위해 이곳의 붉은 모래를 스페인의 알메이라 촬영지까지 퍼다 날랐다. 스페인의 알메이라는 누런 모래였기 때문. 디테일을 따졌던 레오네의 꼼꼼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찍은 술집 장면. 이 장면은 미국 개봉 시 삭제됐다. 왼쪽에 보이는 술집 주인 역의 라이오넬이 맥카시 리스트, 즉 빨갱이 명단에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 이에 분노한 라이오넬은 미국 국적을 버리고 유럽 국가에 귀화했다.
튀니지에서 시칠리아 출신 부모 아래 태어난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CC로 통하며 BB로 불리던 브리짓드 바르도와 함께 은막을 수놓은 이탈리아 스타였다. 이탈리아 미인대회 출신인 그는 미모와 함께 커다란 가슴으로 유명했다. 레오네가 이 작품에 그를 캐스팅한 이유는 섹시함과 모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배우였기 때문.
레오네 감독은 소박함과 개척정신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가족주의를 상징하기 위해 체크무늬 테이블보를 사용했다.
카르디날레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침대 천정보 사이로 내려다보는 이 장면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로버트 드니로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결말 부분에 나온다.
카르디날레가 문으로 다가간다. 문을 연다. 열리는 문을 따라 카메라가 타고 넘어가 문 뒤에 서있는 로바즈를 보여준다. 이런 식의 회전 앵글은 레오네가 즐겨 쓰는 수법이었다. 마치 관객이 문을 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레오네와 베르톨루치, 아르젠토는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서부로 뻗어나가는 철도에 대입시켰다. 철도는 곧 돈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레오네 감독이 즐겨 사용한 극단의 클로즈업. 그는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커다란 와이드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클로즈업을 즐겨 썼다.
이 작품은 촬영에 4개월, 편집에 6개월이 걸렸다. 편집이 더 오래 걸린 이유는 레오네 감독의 완벽주의 때문. 그는 자신이 찍은 모든 장면을 기억해 촬영 감독 및 편집자를 놀라게 했다.
레오네 감독은 "음악이 영화의 40%"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레오네 감독은 음악을 먼저 만들고 영화를 나중에 찍었다. 그는 모리코네의 음악에 맞춰 장면을 구상했으며 촬영장에서도 음악을 틀어놓고 찍었다.
카르디날레의 경우 모리코네가 가장 먼저 만든 '질의 테마'를 촬영 내내 들으며 장면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미국 시사 때 '길고 느린 영화'라는 평을 들으며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무려 48개월 동안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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