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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블루레이)

울프팩 2014. 6. 28. 17:44

원래 쿵후(功夫)는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서 숙달하는 것을 말한다.
쿵후의 시조는 16세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인도에서 온 선승 달마대사가 꼽힌다.

멸청복명의 쿵후
중국 소림사에 당도한 달마대사는 성격이 완고해 승려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근처 동굴에서 9년을 혼자 살았다.
70세 노인이 돼 소림사에 돌아온 달마대사는 승려들이 수양 중에 조는 모습을 보고, 수양만 하다가 체력이 부실해진 승려들을 위해 신체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동작을 고안했다.

그것이 바로 쿵후의 시작이다.
물론 쿵후는 출발이 그렇듯, 싸움 동작도 포함돼 있지만 무술이라기보다는 생명력의 근원인 기를 기르는데 목적이 있다.

주먹으로 말아쥔 오른손을 쫙 편 왼손 바닥에 붙이는 쿵후식 인사법은 원래 해와 달을 상징한다.
바로 한자의 명(明)이다.

여기에는 멸청복명(滅淸復明), 즉 청을 멸하고 명을 부흥시키겠다는 뜻이 숨어 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쓰러뜨리고 들어선 뒤 소림사마저 파괴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무술 영춘권
이후 소림사에서 지선선사, 오매대사, 백미도인, 풍도덕, 묘현 등 5명의 선사가 빠져나갔다.
이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 오매대사다.

숨어서 쿵후를 수련하던 오매대사는 어느 날 우연히 불량배에 협박에 못 이겨 강제로 결혼하게 된 아름다운 여인 엄영춘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됐다.
오매대사는 지혜를 발휘해 엄영춘이 혼인 준비를 한다며 불량배를 설득해 1년 뒤로 결혼 날짜를 잡게 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오매대사는 엄영춘에게 부지런히 소림 무술을 가르쳤다.
그러나 1년 동안 소림무술을 다 배우기는 불가능한 일, 엄영춘은 오매대사가 알려준 38품세 가운데 실효성이 높은 세 가지를 뽑아냈다.

바로 기본자세(少念頭)에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尋橋), 급소를 손가락으로 찌르는(標指) 기술이다.
1년 뒤 결혼식 날, 엄영춘의 아버지는 불량배에게 딸과 싸워 이기면 결혼시키겠다는 제안을 했다.

여자인 엄영춘을 우습게 본 불량배는 쉽게 덤벼들었다가 호되게 당하고 도망갔다.
이것이 바로 영춘권의 시작이다.

영춘권의 대부 엽문과 이소룡
영춘권의 대부로 꼽히는 엽문은 13세 때부터 영춘권을 배웠으나 제자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55세 이후였다.
엽문은 지극히 중국적인 인물이었다.

165cm의 크지 않은 체구였던 그는 서양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해 서양 옷 조차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소룡이 엽문을 찾아간 것은 13세 때였다.

당시 아역배우로 홍콩에서 이름을 알렸던 이소룡은 나름 패거리를 거닐고 다니며 싸움질을 벌였다.
그러다가 쿵후를 배우는 친구에게 호되게 당한 뒤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친구 윌리엄 청을 찾아갔다.

엽문의 제자로 영춘권을 할 줄 알았던 윌리엄 청은 처음엔 이소룡의 부탁을 거절했으나 하도 간곡히 요청하자 엽문에게 데려갔다.
이소룡은 목숨을 걸다시피 열심히 영춘권을 배웠다.

원래 이소룡은 싸움을 위해 영춘권을 시작했지만 엽문에게 배우면서 진정한 무술인으로 거듭났다.
영춘권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영춘권의 미스터리
엽문의 수제자 윌리엄 청에 따르면 원래 영춘권이 두 가지라는 설이다.
엽문은 10대 때 진화선 밑에서 4년간 영춘권을 배웠다.

진화선은 영춘권의 계승자인 량찬의 수제자였다.
그런데 량찬은 진화선이 두 아들보다 실력이 뛰어나자, 자신이 죽은 뒤 제자가 아들들을 제칠까 봐 정통 영춘권 대신 중요한 비기를 뺀 수정된 영춘권을 가르쳤다.

그리고 정통 영춘권은 두 아들에게만 가르쳤다.
진화선은 량찬과 두 아들 중 하나가 죽자 우려대로 남은 아들을 쫓아내고 영춘권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진화선 밑에서 영춘권을 배운 엽문은 공부를 위해 홍콩에 머물던 중 한 노인과 대련 끝에 크게 패했다.
그가 바로 진화선에게 쫓겨난 량찬의 아들이었다.

량찬의 아들은 엽문에게 정통 영춘권을 따로 가르쳤다.
홍콩에서 공부를 마친 엽문은 중국 본토로 돌아가 공산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경찰관으로 일했다.

이후 엽문은 홍콩으로 다시 건너와 1950년대 정통 영춘권의 전수자를 자처하며 윌리엄 청, 이소룡 등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윌리엄 청은 자신만 정통 영춘권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정통 영춘권과 수정된 영춘권은 기본자세, 팔의 위치, 발놀림 등이 다르다.
수정된 영춘권은 발을 바닥에 붙인 채 끌면서 움직이지만 정통 영춘권은 발놀림이 빠르고 가볍다.

윌리엄 청은 엽문 생전에 정통 영춘권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서 이소룡에게 정통 영춘권 방법에 대해 힌트를 주는 식으로 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엽문의 또 다른 제자들은 윌리엄 청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영춘권의 대부로 통하는 엽문이 영춘권을 배운 것은 간결한 기술로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춘권의 비밀
실제로 영춘권의 기본 원리는 상대와 가장 가까운 지점부터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극권처럼 팔을 크게 휘둘러 원을 그리거나 화려한 발차기가 없다.

발차기가 상대의 허리 아래만 공격한다.
예전 이소룡의 제자에게 절권도를 전수받은 김종학 관장이 운영하는 서울 강남역의 한국 절권도 총본산 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수로, 장혁 등이 김 관장에게 절권도를 배우고 있었는데, 그가 가르쳐준 절권도는 특별한 품세가 없었다.
자신을 때리라고 해서 주먹을 뻗었더니 손등부터 팔목, 팔꿈치 관절, 어깨로 타고 들어와 목과 얼굴을 때리는 전광석화 같은 동작이 이어졌다.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손놀림에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김 관장은 그게 바로 영춘권에서 뻗어나간 절권도라고 설명했다.
특히 영춘권에서는 접점 반사를 높게 평가했다.

이소룡 영화를 보면 서로 손목을 대고 있다가 순식간에 상대를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접점 반사다.
즉, 상대와 접촉한 상태에서 상대의 움직임과 공격을 피부로 느끼고 선수를 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춘권에서는 서로 눈을 가리고 접점 반사를 연습한다.
이소룡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피부를 통해 상대의 힘과 방향을 감지하고 이를 막고 미리 공격을 했다.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2013년)는 이처럼 긴 히스토리와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영춘권의 대부 엽문에 대한 영화다.

왕가위가 그린 엽문
엽문이 중국을 떠나 홍콩에 자리 잡게 되기까지 무술인이자 자연인으로서 살아온 그의 인생 여정을 낭만적으로 그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무술 영화라기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다.

무술 대결도 많이 나오지만 싸움 장면조차도 부감 샷과 슬로 모션,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사용해 마치 무용처럼 그렸다.
여기에 왕가위 특유의 꼼꼼함이 배어 있는 아름다운 영상과 시계, 물 등 그의 다른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그만의 독특한 무술 영화를 만들어 냈다.

그만큼 일반적인 격투기 일변도의 무술 영화를 생각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는 '2046'이나 '화양연화'에 가깝다.

왕가위의 페르소나인 양조위가 엽문을 맡았고, 송혜교가 엽문의 아내로 잠깐 등장한다.
독특한 점은 물 흐르듯 움직이는 무술과 시간, 쏟아지는 빗 속에 벌이는 결투 등 전체적으로 물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컬러에서 흑백으로 전화되는 사진 촬영 장면을 집어넣어 이를 챕터 전환의 역할로 삼은 점도 눈에 띈다.
전체적으로 '화양연화'에서 보여준 양식미가 살아 있는 가운데 필립 르 소드의 촬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화양연화' '2046'에서 음악을 맡았던 우메바야시 시게루와 미술을 담당한 장숙평 미술감독이 함께 해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어낸 영향도 있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은은한 입자감이 곱게 느껴지는 영상.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리어가 적절히 울려 서라운드 효과가 잘 살아 있고, 타격음이 둔중하게 울린다.

부록으로 제작과정, 로케이션, 프로덕션 디자인, 인터뷰 등이 한글 자막과 함께 HD 영상으로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왕가위 감독은 완벽한 빗 속 결투 영상을 얻기 위해 30일이나 찍었다. 양조위는  물속에서  20일째 촬영을 한 뒤 힘들다고 말했으나 왕 감독이 계속 밀어붙여 결국 병원으로 실려가 5일간 입원했다. 
양조위는 엽문의 제자였던  링샤오홍에게  영춘권을 배웠다. 그는 무술을 배우던 중 상대방 보호장비에 부딪쳐 두 번이나 팔이 부러졌다. 
엽문을 연기한 양조위와 엽문의 아내를 맡은 송혜교. 
왕가위는 이 작품을 6년간 기획하고 3년 동안 찍었다. 이를 위해 중국  광둥과  봉국사, 대만 등 9개 도시를 방문해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왕가위 감독은 양조위가 연기한 인물이 엽문과 이소룡의 결합체이기를 원했다. 
팔괘장을 구사하는 장쯔이. 그는 촬영을 위해  거춘옌에게  팔괘장을 배웠다. 
머리를 태우기 위해 봉국사를 찾은 장쯔이가 벽에 난 구멍에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앙코르와트를 찾은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전작들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장첸은 팔극권의 대가  왕쓰찬에게  무술을 훈련했다. 
왕가위 감독은 무술인들의 대결을 실전처럼 찍기를 원했다. 전체 무술감독은 '매트릭스' '킬빌' '와호장룡'의 무술감독을 맡았던 원화평이 담당했다. 
이 작품에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축이 된 세 사람의 이야기는 여럿이 모여 단체사진을 찍을 때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는 순간 챕터 전환이 일어나며 전개된다. 그리고 말미에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엽문 옆에 선 작은 소년, 이소룡이다. 
엔딩 타이틀 중간에 인서트 영상이 나온다. 영춘권은 여성이 만든  무술이다 보니  작은 동작으로 상대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발차기도 허리 아래로 집중된다. 
소프라노 산드라 파스트라나가 부른 스테파노 렌티니의 '스타밧 마테르'를 비롯해 히사이시 조와 엔니오 모리코네의 'la donna romantica'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 테마' 등 귀에 익은 음악들이 나온다. 왕가위 영화가 늘 그렇듯 전체적으로 음악이 좋다.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는 중국 무술에 대한 왕가위 감독의 존경과 애정이 담겨 있다. 제목인 일대종사는 널리 무술계에서 존경을 받는 고수를 뜻하는 호칭이다. 홍가권의 황비홍, 영춘권의 엽문, 이소룡의 '정무문'에 등장하는 곽원갑 등이 일대종사로 꼽힌다. 
"진정한 무술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라는 이소룡의 말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소룡에게는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곧 인생이요 무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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