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하류인생

울프팩 2004. 10. 31. 19:36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2004년)은 흑백 TV를 보는 느낌이다.
색상은 화려한 컬러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1960~70년대 흑백 TV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그만큼 그때는 세상 또한 흑과 백이었다.
독재에 반대하면 무조건 빨갱이가 되는 세상이었고, 돈이 없으면 하류인생이 되는 시대였다.

임 감독과 제작자 이태원 사장, 정일성 촬영감독은 이 같은 시대상을 필름에 담았다.
주인공 태웅(조승우)은 1950년대 말 자유당 정권 말기에 불량 학생으로 살다가 건달이 된다.

5.16 쿠데타 덕분에 군부와 줄이 닿아 건설업으로 돈을 만진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70년대 박정희 유신시대에 영화제작자로 변신한다.
이 과정에서 1950년대부터 197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상이 태웅의 삶에 에피소드처럼 투영된다.

풍경은 물론이고 말투, 복장, 심지어 배우들의 생김새까지 시대를 닮았다.
그런 점에서 어찌보면 이 작품은 이제는 육순과 칠순에 접어든 세 노장이 허연 머리를 맞대고 옛날을 반추하며 털어놓은 경로당 노인네들의 담화 같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영화는 한없이 진부하고 어설픈 작품이 돼버린다.
그러나 그 시대의 추억거리를 갖고 있으면 이 작품은 묘한 향수와 함께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남들과 말로 설명하기 힘든 좋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대로 건달 역할이 잘 어울린 조승우도 좋았고, 오랜만에 김추자 목소리로 듣는 '님은 먼 곳에'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신중현도 이제 육순이 넘은 노인이다.
그가 만든 주제가를 듣다 보니 올해 초 그를 만났을 때 온통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리와 주름투성이 얼굴이 떠오른다.

의외의 발견은 김민선.
'여고괴담 2'에서 눈에 안 띄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완전히 달리 보인다.

혹자는 그의 대사와 연기를 문제 삼지만, 영화에 녹아든 분위기로 봤을 때 그는 완전히 1970년대 여인이었다.
청춘물보다 오히려 그에게는 이런 시대극, 이런 역할이 잘 어울리는 듯싶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이 뛰어난 편이 아니다.
감상에 큰 지장은 없지만 군데군데 색감이 변하며 잡티도 보인다.

DTS와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다소 과장된 편.
대사 전달은 또렷하고 배경 음악도 잘 살아있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이 작품은 액션물이 아니다. 이 사진이 주는 따스함과 가슴 뭉클한 향수가 이를 말해준다.
초반 조승우의 얼굴이 지나치게 붉게 나온다. 중간에도 이런 색감 변화가 일어나는데, 아마도 DVD 제작을 위한 트랜스퍼 과정에서 색감조정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김민선은 잘 어울리는 배역을 찾은 듯싶다. 둥그스름한 얼굴선이 1970년대 여인 역할을 하기에 제격이다.
자유당 말기 모습을 다룬 초반은 임 감독의 '장군의 아들'과 분위기가 흡사하다. 이를 두고 답습이나 자기 복제라는 말들이 있는데, 작품을 99편이나 만들면 이미지 중첩은 피할 수 없는 일인 만큼 탓할 꺼리는 아니라고 본다.
1960년대 명동. 이 장면은 부천 '야인시대' 세트장을 개조해 촬영했다.
이 장면은 빛깔이 참 좋다. 옆으로 비껴 든 햇살과 연한 베이지색 벽지와 커튼, 배우들의 의상까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흔치 않은 샷이다. 친구의 누나를 사랑하니 그 속이 얼마나 복잡할까. 연하남에게 끌리는 여자 또한 당시 시대상에 비춰보면 속이 말이 아니었을게다. 아마 골대 그물망보다 더 마음이 얽히고설키지 않았을까 싶다.
1960~70년대 영화판은 주먹들의 세계였다. 깡패들이 제작부장을 맡아 배우, 감독을 휘어잡던 풍경을 그대로 재현했다.
날 것 그대로의 액션이 제법 괜찮다. 대부분 액션을 조승우가 연기했고 고난도 동작만 대역을 썼다.
임산부의 배를 발로 걷어차는 행위는 어떤 폭력보다 가혹하고 끔찍하다. 깨진 어항 사이로 피처럼 붉은 금붕어들이 쏟아져 내린다.
슬로 모션으로 처리된 액션도 좋았는데, 정말 볼 만한 액션들은 모두 삭제됐다. 삭제된 장면들은 DVD에 부록으로 실렸다.
태웅이 첫 아이를 얻는 장면은 임 감독의 실제 에피소드를 옮겼다.
이태원 사장이 가장 좋아한 장면. 춤바람이 나서 남편에게 이혼당한 뒤 집 나간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던 태웅이 아들을 얻은 뒤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고 다시 찾는 장면이다.
1970년대 장발 단속 장면.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도 등장한다. 실제 머리를 깎인 가수 역할을 한 사람들은 배우가 아닌 연출부원들이다.
윤복희가 입고 나와 유행을 일으킨 미니스커트도 1970년대 단속대상이었다. 무릎 위 20cm 이상 치마가 올라가면 단속감이어서 경찰이 자로 치마 길이를 쟀다. 실로 어이없는 야만적 규제다. 아가씨들 또한 스태프들이다.
사람들이 이 영화에 가장 실망한 이유는 열린 결말 때문이다. 우리나라 관객들은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도 540만 명에 그친 듯싶다. 영화 속 범인을 잡았더라면 훨씬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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