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1월 29일,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도로를 순찰하던 경관이었다.
밤 중에 라이트를 켜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정차시킨 경관은 자동차로 다가갔다가 운전자가 쏜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마침 순찰차에 타고 있던 동료 여경이 뛰어나와 달아나는 차를 향해 발포했으나 너무 놀라 차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랜들 아담스와 데이비드 해리스 사건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용의자가 잡혔다.
16세 소년 데이비드 해리스였다.
여러가지 말썽을 자주 일으켜 보호관찰 상태였던 해리스는 TV뉴스에 나온 사건 보도를 보고 친구들에게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도난된 차량을 운전한 사실과 총을 버린 장소도 정확히 안내했다.
경찰은 그의 안내 덕분에 늪지에서 경관 살해에 사용된 22구경 권총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는 검찰 조사에서 모든 것을 뒤집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당시 동승했던 28세 청년 랜들 애덤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랜들은 길가에서 우연히 데이비드의 차량에 동승했다.
랜들은 범행이 일어나기 두 시간 전에 데이비드와 헤어졌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믿지 않았다.
당시 텍사스주는 사형제가 있었으나 16세 소년에게는 사형을 선고할 수 없었다.
검찰과 법원은 사형 선고가 가능한 28세의 랜들을 범인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랜들의 변호사들은 데이비드의 주장만 있고 증거가 없으니 무죄로 풀려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재판정에 갑자기 증인이 나타났다.
마침 우연히 차를 타고 범행현장을 지나던 한 부부가 차에 두 사람이 타고 있었고 랜들이 총을 쏘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공교롭게 증언을 한 부부는 절도와 마약을 한 적이 있고 남편과 칼을 휘두르며 싸우다 입건된 상태였으며 딸도 말썽을 일으켜 감옥에 갈 상황이었다.
그러나 증언 이후 딸의 사건은 기각됐다.
증인 부부의 딸을 풀어준 판사는 공교롭게 랜달 사건의 재판관이었다.
여기에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여경도 처음에는 범인이 털 재킷을 입었다고 주장했으나 법정에서는 털이 아니라 랜들과 같은 덥수룩한 머리라고 말을 바꿨다.
결국 랜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배심원 9명 전원도 랜들이 유죄라고 평결했다.
당시 랜들의 변호사는 "단지 그가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나이여서 유죄가 됐을 뿐"이라며 반발했다.
재판관도 "그저 떠돌이일 뿐이나 신경쓰지 마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는 풀려났으나 이후 수 차례 납치와 강도질을 하다가 체포돼 1985년 7건의 살인 혐의로 사형수가 됐다.
하지만 랜들은 바로 풀려 나지 못했다.
워싱턴 연방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종신형으로 감형됐을 뿐이다.
랜들의 변호사는 이 사건 이후 "사법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며 일을 그만 뒀다.
다큐의 형식을 바꾼 다큐
애롤 모리스 감독이 만든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년)은 바로 랜들과 데이비드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사건 발생 10년이 지나 제작된 이 작품은 두 가지 이유로 논란이 됐다.
우선 법원 판결을 뒤흔든 내용이 문제였다.
사건의 진실에 의문을 품은 그는 사법부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용의자인 랜들과 데이비드를 비롯해 수사관과 검사, 변호사, 증인과 주변인물들을 일일이 인터뷰했다.
이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며 사법부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범인이 누구라고 단정짓지 않고 정황을 통해 관객이 판단하도록 했다.
결정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등장한 데이비드의 육성 녹음이다.
데이비드는 "랜들이 무죄냐?"라고 묻는 감독의 질문에 "그렇다"고 단언했다.
감독이 재차 "어떻게 확신하냐?"고 묻자 데이비드는 "내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랜들은 단지 그날 저녁 그를 도와줄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해서 죄인이 됐을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상 자백이었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셈이다.
이는 곧 사법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두 번째 논란은 작품의 형식이다.
기존 다큐는 '동물의 왕국'처럼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영상을 보여줬는데 반해 이 작품은 사건을 드라마처럼 재구성했다.
즉 동일 내용에 대해 용의자와 증인, 검찰 수사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반영해 '그것이 알고 싶다'처럼 영상을 꾸몄다.
특히 살인사건 현장을 재현하는 장면에서 느와르에 몰두했던 감독의 취향을 반영해 느와르물처럼 꾸몄다.
그 바람에 감독이 재현한 영상을 다큐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잘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1989년 아카데미상 다큐부문 후보에서 제외됐다.
당시에는 이질적인 형식 때문에 논란이 일었지만 이후 등장하는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다큐에서는 이 작품과 같은 형식을 많이 따랐다.
그래서 30년전 작품인데도 요즘 다큐를 보는 것처럼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
에롤 모리스 감독이 취한 이 같은 방식은 확실히 논란이 분분한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데 유리하다.
동일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상충할 때 이를 영상으로 다르게 구성해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만큼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관점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적절한 교차 편집을 통해 사건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면서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필립 그래스의 음악을 곁들여 긴장감을 불어 넣는 동시에 감성을 자극했다.
이 또한 다큐멘터리 보다는 드라마투르기에 가깝다.
이 같은 형식의 파괴가 논란을 불러 왔지만 이 작품을 차별화하며 돋보이게 만들었다.
아울러 사회 정의에 기여할 수 있는 영화의 힘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레터박스 포맷의 DVD 타이틀 영상은 화질이 좋지 않다.
디테일이 떨어지고 암부가 많이 묻힌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2.0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은 전혀 없다.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한편 데이비드와 랜들은 어떻게 됐을까.
데이비드 해리스는 2004년 6월 살인 납치혐의로 텍사스주 헌츠빌에서 43세 나이에 사형 당했다.
랜들 애덤스는 12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풀려 났으나 2010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DVD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경관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체포된 랜들 애덤스.
사건 당시 16세 소년이었던 데이비드 해리스. 랜들이 범인이라고 지목한 뒤 풀려났다.
데이비드는 경관 살해에 사용된 총기를 버린 장소를 정확히 지목했다. 경찰들은 늪지에서 총을 찾았다.
에롤 모리스 감독은 내레이션을 사용하지 않고 당시 신문기사, 법정 기록화 등을 사용해 정황을 설명했다.
애롤 모리스 감독은 사건 현장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각기 다르게 구성해 보여줬다.
사건의 실마리가 발견된 텍사스의 비더지역은 KKK단의 텍사스 본부가 있는 곳으로, 아주 보수적이다.
거짓 증언을 한 것으로 의심받는 여인도 인터뷰에 등장한다. 에롤 모리스 감독은 인터뷰 대상자가 카메라를 응시하도록 해서 관객이 고백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했다.
데이비드 해리스는 이 사건에서 풀려난 뒤 강도짓을 벌이다가 군에 들어가 독일에 파병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상관을 폭행해 군 교도소에 수감됐고 풀려난 뒤 미국에 돌아와 강도 및 납치 후 살인 행각을 벌이다가 체포됐다.
막바지 최후 인터뷰에서 엄청난 고백이 터져 나온다. 제목인 가늘고 푸른 선은 경찰이 질서 유지를 위해 둘러치는 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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