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한국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그 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영화가 국내 개봉했다.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kford) 감독의 '백야'(White Nights, 1985년)다.
당시 서울에서 유일한 70미리 상영관이었던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하루에 내리 3번을 보았다. 새내기 대학생 때인 만큼 할 일이 많았던 친구는 첫 회를 같이 본 후 후다닥 달아나버렸지만 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와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의 노래에 매료돼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 바리시니코프의 팬이 돼 그가 출연한 영화 '지젤'도 보았고 나중에 '백야'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영상이 뭉개질 때까지 봤다. 비소츠키 노래도 마찬가지.
당시 국내에서는 그의 음반을 구할 수 없어 FM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던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열심히 들었다. 한 작품에 이처럼 매료돼 모든 것을 전력투구해 본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반대로 그때까지 가졌던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과연 이 작품처럼 대단한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바리시니코프를 위한, 바리시니코프에 의한, 바리시니코프의 작품이다. 줄거리는 사실 별 볼일 없고 유치하다.
당시까지 대립관계였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 논리에 입각해 철저한 미국 찬가로 일관했기 때문.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단 한 가지, 바리시니코프였다.
전체 영화에서 몇 부분 안되지만 그가 보여준 춤은 사람들을 감동과 충격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구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발레리노 바리시니코프가 무용계에서 은퇴한 지금은 물론이고 이전과 이후에도 이토록 감동적인 춤을 볼 수 있는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아울러 지금은 고인이 된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Hines)의 탭 댄스도 압권이다.
그가 혼자 연습실에서 카세트 음악에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해 추는 춤은 새삼 하인즈가 얼마나 대단한 탭 댄서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로 이 영화는 1986년 국내 흥행 1위였다. 어쩐 일인지 개봉 20년 만에 뒤늦게 출시된 DVD는 반갑기도 하지만 어이없다.
오리지널 와이드 스크린의 좌우를 뚝 잘라 4 대 3 포맷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마치 바리시니코프가 새장에 갇혀 춤을 추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의 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덥석 구입했다.
화질은 편차가 심하다. 일부 클로즈업은 깨끗한데 몇 장면은 배경이 지글거리며 뭉개진다.
세로줄과 잡티도 보인다. 음향은 돌비 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지만 소리가 주로 전방에 집중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