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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DVD / 블루레이

백야

울프팩 2005. 7. 3. 12:25

1986년 한국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그 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영화가 국내 개봉했다.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kford) 감독의 '백야'(White Nights, 1985년)다.

당시 서울에서 유일한 70미리 상영관이었던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하루에 내리 3번을 보았다.
새내기 대학생 때인 만큼 할 일이 많았던 친구는 첫 회를 같이 본 후 후다닥 달아나버렸지만 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와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의 노래에 매료돼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 바리시니코프의 팬이 돼 그가 출연한 영화 '지젤'도 보았고 나중에 '백야'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영상이 뭉개질 때까지 봤다.
비소츠키 노래도 마찬가지.


당시 국내에서는 그의 음반을 구할 수 없어 FM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던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열심히 들었다.
한 작품에 이처럼 매료돼 모든 것을 전력투구해 본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반대로 그때까지 가졌던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과연 이 작품처럼 대단한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바리시니코프를 위한, 바리시니코프에 의한, 바리시니코프의 작품이다.
줄거리는 사실 별 볼일 없고 유치하다.

 

당시까지 대립관계였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 논리에 입각해 철저한 미국 찬가로 일관했기 때문.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단 한 가지, 바리시니코프였다.

 

전체 영화에서 몇 부분 안되지만 그가 보여준 춤은 사람들을 감동과 충격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구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발레리노 바리시니코프가 무용계에서 은퇴한 지금은 물론이고 이전과 이후에도 이토록 감동적인 춤을 볼 수 있는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아울러 지금은 고인이 된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Hines)의 탭 댄스도 압권이다.

그가 혼자 연습실에서 카세트 음악에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해 추는 춤은 새삼 하인즈가 얼마나 대단한 탭 댄서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로 이 영화는 1986년 국내 흥행 1위였다.
어쩐 일인지 개봉 20년 만에 뒤늦게 출시된 DVD는 반갑기도 하지만 어이없다.

 

오리지널 와이드 스크린의 좌우를 뚝 잘라 4 대 3 포맷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마치 바리시니코프가 새장에 갇혀 춤을 추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의 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덥석 구입했다.

화질은 편차가 심하다.
일부 클로즈업은 깨끗한데 몇 장면은 배경이 지글거리며 뭉개진다.

 

세로줄과 잡티도 보인다.
음향은 돌비 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지만 소리가 주로 전방에 집중돼 있다.

<DVD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초반부터 바리시니코프의 현대 무용으로 강렬한 충격을 준다. 그는 바흐의 '파사칼리아'에 맞춰 장 콕토의 '죽음과 소녀'를 무용으로 표현했다. 뒤에 콕토의 초상화가 보인다.
구 소련의 키로프 발레단 솔리스트였던 세계적인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영화처럼 1974년 캐나다 공연 때 서방으로 망명했다.
객석에서 탄성이 터진 유명한 장면. 의자를 밟고 넘어가는 이 장면은 이후 옷 CF에서 배우 이종원이 따라 했다.
꼿꼿하게 물구나무 선 상태에서 시곗바늘이 움직이듯 일자로 천천히 내려온다. 곡예에 가까운 엄청난 솜씨다.
바리시니코프의 망명동기는 구 소련에서 하기 힘든 현대무용을 마음껏 해보는 것이었다.
국내 개봉 시 삭제된 장면. 2003년 암으로 사망한 탭댄서 그레고리 하인즈가 거쉰의 '포기와 배스'를 공연하는 장면이다. 약 10분가량의 공연 장면이 모두 삭제됐는데, 이유는 상영시간을 2시간으로 줄여 1회를 더 틀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비디오테이프와 TV 방영 시 복원됐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 이자벨라 롯셀리니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관객의 경탄을 불러일으킨 장면. 바리시니코프는 1 루블에 1회전을 도는 조건으로 내기를 걸고 한 발을 파세한 상태에서 한쪽 발로 11번의 회전을 순식간에 해낸다.
데이비드 포스터의 '탭댄스'에 맞춰 하인즈가 햇살이 비껴 드는 연습실을 두 발로 연신 나무 바닥을 두드리며 종횡무진 누비는 장면이 압권이다.
키로프 극장을 재현한 세트. 구 소련에서 촬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트를 만들었다.
"Look at me!" 옛 애인 앞에서 바리시니코프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질주하는 말'에 맞춰 자유 의지를 절규하듯 춤으로 표현한다.
극장에서는 비소츠키의 노래가 온전하게 나왔으나 나중에 TV에서 방영할 때 이 장면에 라이오넬 리치의 'Say You, Say Me'를 대신 틀었다. 구 소련과 수교 전이어서 러시아어를 방송에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TV 방영 때는 충격과 감동이 사라지고 아주 웃긴 장면이 돼 버렸다. 고통과 갈증을 표현한 딱딱 끊어지는 바리시니코프의 춤이 라이오넬 리치의 부드러운 발라드와 안 맞았기 때문.
작은 키의 바리시니코프는 현존 무용수 가운데 황금비율의 몸을 가진 최고의 발레리노로 꼽힌다.
비소츠키의 노래에 맞춰 5분 정도 이어지는 바리시니코프의 춤은 보는 숨을 멎게 한다.
구 소련의 반체제 가수였던 비소츠키는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나 끊임없이 KGB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지하에서 비밀리에 카세트테이프를 녹음해 팔았던 비소츠키는 1980년 사망했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정권때 그의 동상을 세워줬다.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 바리시니코프가 온몸을 발 끝으로만 튕겨 움직이던 장면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바리시니코프는 옛 애인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는 앞에서 자유의지가 얼마나 절절한지 춤으로 표현한다.
바라시니코프는 어떻게 저런 표현을 생각했을까.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이토록 감동적인 춤을 췄던 바리시니코프는 은퇴해 화이트 오크 댄스 프로젝트라는 현대무용단을 이끌었다. 바리시니코프와 이 단체는 2001년 방한 공연을 가졌다.
흑과 백, 러시아인과 미국인, 발레리노와 탭 댄서,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과 소련으로 망명한 사람 등 모든 면에서 대립관계였던 두 사람은 춤으로 화해 시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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