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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붉은 수수밭(블루레이)

울프팩 2021. 2. 13. 16:53

중국판 '분노의 포도'라고 할 수 있는 '붉은 수수밭'(紅高梁, 1988년)은 장이머우(장예모)라는 걸출한 중국 감독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그는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로 중국 제5세대 감독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모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다분히 민족적이며 사회주의적이다.

돈 때문에 양조장을 운영하는 쉰 살 넘은 노총각이자 나병 환자에게 팔려간 젊은 여성(공리)의 이야기다.

 

시집갈 때까지만 해도 여성은 다분히 일부종사(一夫從事)의 틀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남편의 죽음으로 술도가를 맡게 되면서 여성은 여장부로 변신한다.

 

남정네들을 이끌고 술도가를 일으키며 급기야 항일 무장투쟁에 나서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여인은 더 이상 봉건적 잔재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성 있는 삶의 주인이 된다.

 

이 과정을 장예모 감독은 흥미로운 이야기와 강렬한 색감의 영상으로 보여준다.

특히 작품 내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핏빛처럼 붉은 영상이다.

 

고량주 색깔처럼 강렬한 붉은빛은 운명을 개척하는 여인의 상징이자 중국 민족의 색깔이기도 하다.

술도가 마을의 황량한 황톳빛과 더불어 붉은색은 절대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자 거센 저항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 제목처럼 붉은 수수밭은 여러 가지 함의를 담고 있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

여인이 겁간을 당하며 운명의 변화를 겪는 장소도 붉은 수수밭이요,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학살하는 피로 얼룩진 현장도 붉은 수수밭이다.

 

그런 점에서 수수밭은 고난과 역경의 험난한 중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여인은 스스로 운명을 바꿀 결심을 하고 중국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한다.

 

그런 점에서 고난의 장소는 곧 변화의 역동성을 담은 장소이자 저항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곧 과거의 고난을 토대로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내는 변증법적 사관을 보여주는 장소다.

 

그렇다고 중국의 체제나 국가관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저 험난한 시절을 살아온 중국인들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장예모 감독의 이 작품은 기존 할리우드 작품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지극히 중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영화다.

그만큼 이 작품은 이전 작품들과 다른 신선하고 충격적인 영화다.

 

제38회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수상은 당연한 결과다.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 색깔만큼이나 강렬한 영상을 빼놓을 수 없다.

 

수숫대가 물결처럼 바람에 일렁이는 장면이나 온통 붉디붉은 색깔로 가득 찬 가마 속 공리의 얼굴, 햇빛을 정면으로 찍어 눈이 부신 영상 등이 특이하면서도 뇌리에 박혀 잊히지를 않는다.

더불어 이 작품부터 인연을 맺어 장예모 감독의 작품 대부분에 빠지지 않고 출연한 공리의 연기도 높이 칭찬할 만하다.

 

그는 애잔한 여성성과 강인한 남성성이 모두 스며있는 묘한 얼굴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별다른 화장 없이 맨 얼굴로 나와도 여주인공의 비극적인 인생사를 충분히 진정성 있게 전달할 수 있다.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4장짜리 장예모 감독의 박스세트에 들어 있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옛날 영화여서 디테일이 좋지는 않지만 강렬한 색감이 잘 살아 있다.

별다른 잡티나 필름 손상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음향은 DTS HD MA 1.0을 지원한다.

부록은 전혀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이 작품은 공리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모옌의 소설 '붉은 수수밭'과 '고량주'를 섞어서 만들었다.
컬러 필터를 사용해 만들어낸 핏빛같은 강렬한 붉은 색이 인상적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 내린 모옌은 본명이 관모야다. 그는 소설 '붉은 수수' 시리즈로 1980년대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모옌이 강조하듯 붉은 수수밭은 저항의 민족 정신을 의미한다. 온갖 풍상에도 굴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수수처럼 역사의 질곡에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중국인들의 민족성을 빗댄 것이다.
모옌은 고향 가오미현이 홍수가 심해 키 작은 농작물을 심을 수 없어 키 큰 수수만 심었다고 회고했다. 어려서 본 기억이 작품의 토대가 됐다.
모옌은 영화 대본의 각색에도 참여했다.
영화는 특이하게 화자의 조부모 이야기다. 정작 화자는 스크린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장예모 감독은 이 작품을 연출하기 전에 촬영감독으로 몇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래서 영상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
모옌은 1986년에 첫 번째 소설 '붉은 수수'를 시작으로 '고량주' '개의 길' '수수장례' '기이한 죽음' 등을 발표했다. 그는 다섯 편을 묶어 '붉은 수수 가족'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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