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국두' 등 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의 초기작은 여성의 삶에 주로 초점을 맞췄다.
특히 중국의 오랜 전통처럼 굳어진 유교 사상과 봉건제적인 삶에 뿌리 깊이 사로잡혀 남자에게 종속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주로 다뤘다.
이를 통해 과거의 잘못된 전통과 단절하고 주체적이고 평등한 인격적 존재로 바로 서는 여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비단 중국이 요구하는 생산주체이자 혁명주체인 사회주의적 여성상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적 추세인 양성 평등의 보편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축첩제도를 다룬 영화
'홍등'(大紅燈籠高高掛 1991년)도 마찬가지다.
장이머우 감독이 이 작품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중국의 봉건제적 전통인 축첩 제도다.
주인공인 송련(공리)은 대학을 중퇴하고 먹고살기 위해 부자인 진대인의 네 번째 부인이 된다.
이미 그곳에는 어머니 뻘인 첫째 부인과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둘째 부인, 그리고 여배우 출신의 젊은 셋째 부인이 있다.
이들은 자금성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저택에서 각각 별채에 나눠 기거한다.
당연히 여성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가 도사리고 있으나 겉으로는 암묵적인 평화가 흐른다.
특이한 것은 진 가문의 독특한 전통이다.
여러 부인들 가운데 남자가 그날 밤을 보내기로 선택한 여성의 별채에 주홍색 등이 걸린다.
더불어 간택된 여성에게는 특별히 하녀가 발 안마를 해준다.
또 다음날 식사 메뉴를 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여성들은 발 안마에 취해, 그리고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를 수 있는 권력에 취해 홍등을 얻으려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펼친다.
이미 첩들과 비슷한 나이의 장성한 아들을 둔 나이 많은 첫째 부인은 굳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지만 젊은 첩들에게 홍등을 얻기 위한 투쟁은 삶의 이유가 된다.
마치 하렘처럼 여성들이 벌이는 권력 싸움은 결국 비극의 씨앗이 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지 못하고 가부장만 바라보며 집 안에서 벌이는 싸움은 결코 행복한 결말에 다다를 수 없다.
비록 홍등을 차지했더라도 보이지 않는 사슬에 얽매인 굴종의 삶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홍등의 붉은색은 주체적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의 색이자 이제는 버려야 할 봉건제적 폐습을 상징하는 빛깔이다.
강렬한 영상과 장이머우의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 붉은색은 결코 억압에 굴하지 않는 중국 민족과 주체적 삶을 사는 여성의 색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의 색이 됐다.
그렇게 대비되는 요소로 사용한 장이머우 감독의 선택이 흥미롭다.
빛은 빛일 뿐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유연성으로 읽힌다.
언제나 그렇듯 장이머우 감독의 탁월한 영상 감각은 이 작품에서도 예외 없이 빛난다.
무채색에 가까운 대저택에서 점등된 홍등은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더불어 거대한 저택인데도 선과 면으로 분할돼 영상에 나타나는 별채의 모습은 답답하고 폐쇄적으로 보인다.
이 또한 축첩제도 아래 놓인 여성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면과 선으로 가득 찬 화면 위에 방점처럼 찍힌 붉은색은 절제되면서도 아름다운 균형미를 느끼게 한다.
이야기를 떠나 화면 구성만으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영화다.
여기에 카메라 움직임 또한 지극히 연극적이다.
여성들이 기거하는 각각의 별채는 하나의 연극 무대 같다.
즉 닫힌 프레임 안에서 배우들이 제한된 동선 아래 거의 움직임 없이 길게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극이다.
그러면서도 여성들의 권력 투쟁의 서사가 흥미롭게 펼쳐지는 것을 보면 새삼 장이머우 감독의 연출력에 놀라게 된다.
장이머우 감독은 권력투쟁의 끝을 권선징악의 당연한 귀결로 끝맺지 않는다.
누가 이기든 정의롭거나 선할 수 없으며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존엄성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끝에는 비극적 몰락만 있을 뿐이다.
더불어 장이머우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공리의 연기 또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작품에서도 권력투쟁에 뛰어든 여인의 모습을 팔색조 같은 다양한 연기로 선보였다.
조명에 따라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슬프거나 외롭게 보이는 그의 표정 연기를 보면 장이머우 감독의 연출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한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것은 축첩제도와 봉건적 삶을 혹독하게 비판한 장이머우 감독은 정작 영화 속 진대인처럼 4명의 여성 사이에서 7명의 아이를 낳았다.
물론 동시에 4명의 여성을 첩처럼 거느린 것은 아니지만 4번의 결혼 또한 아니다.
공리 또한 한때 유부남인 장이머우 감독의 연인이었다.
비록 개인의 삶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만 영화만 놓고 보면 예술적 가치가 높은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도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받았다.
로저 에버트의 오독
재미있는 것은 유명한 미국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이 작품을 일본 영화 '모래의 여자'와 비교하며 성 노예를 다룬 영화라고 오독한 점이다.
중국의 축첩제도, 확대하면 동양의 축첩제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축첩 제도에 깔려 있는 권력관계와 빈부 격차 등 사회적 배경을 읽어내지 못했다.
봉건시대부터 이어진 축첩제도는 성 노예와 달리 절반은 여성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점이다.
많은 여성들이 먹고살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자의 반 타의 반 첩이 됐다.
로저 에버트가 동양 역사와 문화를 잘 모르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이자 실수를 한 셈이다.
이 작품의 블루레이 타이틀은 장이머우 감독 박스세트에 포함돼 국내 출시됐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영상은 화질이 무난하다.
클로즈업은 볼 만 하지만 중경이나 원경은 디테일이 떨어진다.
음향은 DTS HD MA 2.0을 지원하며 부록은 전혀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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