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프라하에 갈 때마다 성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을 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유명한 춤추는 건물에서 좌회전해서 100미터 가량 쭉 올라가면 된다고 하던데, 춤추는 건물까지 가보고도 그곳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지나치며 봤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은 이름처럼 성인의 반열에 든 키릴과 메소디우스 형제를 기리는 곳이다.
성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의 추억
이 두 사람은 동유럽 역사 뿐 아니라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9세기 모라비아 등 동유럽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파견된 두 사람은 대부분 문맹인 현지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
그 문자가 바로 창시자 이름을 딴 키릴 문자다.
이들은 이를 이용해 슬라브 민족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처음으로 성서를 번역했다.
덕분에 동유럽 지역에도 기독교가 전파됐고 슬라브 문화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모라비아에서는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했고 불가리아 사람들이 키릴 문자를 도입해 발전시켰다.
그만큼 체코 사람들로서는 이들에게 봉헌한 성당을 만들만 하다.
체코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성당은 20세기 들어서도 아픈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체코의 굴욕 역사
바로 제 2 차 세계대전 때 체코를 점령한 나치 독일의 총독이었던 친위대(SS)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체코 특공대원들이 최후를 맞은 곳이다.
영국에서 망명 체코군대 대원이었던 얀 쿠비치와 요셉 가브칙 등은 1942년 낙하산으로 몰래 체코에 잠입해 그해 5월27일 하이드리히를 프라하 한복판에서 암살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로부터 채 한달이 되지 않았다.
6월18일 성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에 숨어 있는 쿠비치 일행은 나치 독일군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다가 모두 가슴아픈 최후를 맞았다.
지금도 성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에는 총탄 자국이 선명하며 이들의 용기와 투쟁을 기린 기념판이 붙어 있다.
사실 체코 사람들은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에게 키릴 문자에 대한 빚을 졌듯이, 쿠비치 등 이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빚을 졌다.
제 2 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체코를 병합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던 히틀러는 체코 대통령인 하하를 베를린으로 불러 강하게 압박해 항복을 받아냈다.
즉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히틀러 앞에서 체코는 총 한 발 쏴보지 못하고 그냥 국가를 내줬다.
덕분에 오늘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카를 광장을 비롯해 천문시계 등 오래된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지킬 수 있었지만 국가와 국민은 나치 독일의 2등 국민으로서 종전까지 굴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런 상태로 전쟁이 고스란히 끝났다면 체코는 독일이 가져간 수데텐란트 땅을 돌려받지 못했을 것이다.
체코가 빚을 진 젊은이들
체코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쿠비치 일행이 목숨 바쳐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덕분이었다.
덕분에 망명 정부와 망명 군대의 존재를 인정받은 체코는 전후 수데텐란트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하이드리히는 단순히 체코 총독 뿐만 아니라 나치 친위대의 두뇌 역할을 했다.
그래서 로랑 비네는 최근 국내에도 번역 출간한 하이드리히 암살을 다룬 책 제목을 'HHhH'로 지었다.
이는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고 불린다'(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의 약자다.
히믈러는 나치 친위대 수장이다.
교활하고 잔혹했던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절멸계획은 물론이고 히틀러와 히믈러, 괴링 등 나치 수뇌부가 에른스트 룀 등 같은 나치 창당 동료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다질 수 있도록 갖가지 방법들을 제공했다.
아마도 하이드리히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게쉬타포를 지휘하거나 그보다 더 큰 기관을 맡아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체코 뿐 아니라 유럽인들로서는 쿠비치 일행의 거사가 퍽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루이스 길버트 감독의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 1975년)은 바로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을 다룬 실화 영화다.
감동적인 명작의 탄생
감독은 역사적 사건을 담담하게 쫓아가며 이들의 이야기를 긴장감있게 풀어 놓았다.
이 사건은 영화로 만들만큼 극적이다.
어렵게 침투한 요원들이 힘들게 암살을 벌이지만 배신과 밀고로 처절한 최후를 맞기 때문이다.
이를 길버트 감독은 절제된 영상과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를 통해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작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길버트 감독은 체코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어 실제 사건이 벌어진 프라하 현장에서 촬영했다.
영화를 보면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한 길목부터 쿠비치 일행이 처절한 항전을 벌인 성당 등이 고스란히 등장한다.
여기에 이 영화를 오래도록 잊지 못하게 만드는 또다른 요소는 음악이다.
데이비드 헨셀이 담당한 비장한 선율의 음악들은 최후의 장면들과 함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의 모습이 워낙 강렬해 국내에서도 여러 번 TV 전파를 탄 이 작품은 원래 작전명을 딴 '앤트로포이드'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됐다.
또 비네의 소설 'HHhH'를 토대로 한 영화도 내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 예정이다.
여러 번 영화로 만들 만큼 역사적 울림이 강한 사건이다.
하지만 국내 시판된 DVD 타이틀은 오히려 작품의 성가를 제대로 보여주기에 여러모로 미치지 못한다.
우선 화면 자체가 4 대 3 풀스크린이다.
당연히 좌우 화면이 잘릴 수 밖에 없고, 심지어 화면 윗부분은 살짝 휘어 보이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지글거림과 계단현상도 나타나고 화면 디테일은 말할 수 없이 떨어진다.
빨리 깨끗한 영상의 블루레이 타이틀이 국내에도 출시됐으면 좋겠다.
여기에 한글 자막 번역도 엉망이다.
하이드리히를 헤이드릭으로 번역해 놓았는데 일부 장면에서는 또 하이드리히라고 써놓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누구인 지 헷갈릴 수 있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스테레오 방식이며, 부록은 배우와 감독에 대해 한글로 써놓은 설명이 전부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얀 쿠비치를 연기한 티모시 보텀스는 1970년대 유명한 영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에서 주연을 맡아 낯이 익다.
프라하의 구시가광장에서 촬영한 장면. 멀리 첨탑이 나란히 선 틴성모교회가 보이고 왼편에 유명한 천문시계가 서 있다. 캡처 사진을 보면 첨탑이 휘어보이는데 DVD 영상이 그렇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원작은 앨런 버지스가 쓴 소설 '새벽의 7인'이다. 국내에서는 한참 늦은 1979년에 개봉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연기한 독일배우 안톤 디프링. 1940년대부터 배우로 활동한 그는 1989년에 사망했다.
원래 이 작전의 이름은 유인원작전이다. 영화 제목은 원작 소설 제목에서 따 왔다.
하이드리히는 메르세데스320 컨버터블에 탄 채 수류탄 공격을 받아 파편상을 당한 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나치 독일의 보복은 잔혹했다. 범인을 찾지 못하자 프라하 근교의 작은 시골마을인 리디치를 완전히 파괴했다. 남자들은 모두 처형했고 여자들은 수용소로 보냈으며 아이들은 생년월일, 이름, 고향 등을 지운 채 유럽 각지로 흩어서 입양 보냈다. 그리고 마을을 초토화 시킨 뒤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리디치는 전후 복구됐다.
두 연인 너머로 멀리 언덕 위 프라하 대통령궁이 보인다. 나치 점령 시절 총독관저였다. 이전에는 체코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궁전이었다. 체코 사람들은 과거 식민지배의 상징같은 이 건물을 지금도 대통령궁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산 교육을 위해서라고 한다.
루이스 길버트 감독은 007 시리즈로 유명하다. '두 번 죽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문레이커' 등 007 시리즈를 감독했다.
나치 독일은 성당 지하에 숨어 격렬하게 저항하는 특공대를 잡기 위해 지하실 창에 소방 호스를 꽂아놓고 물을 들이 부었다. 지금도 총탄 자국이 선명한 그 창 위에 특공대를 기리는 기념판이 붙어 있다.
비장한 선율과 함께 가슴 아프게 다가 왔던 마지막 장면. 실내 장면 등은 프라하 바란도프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젊은이들의 최후 못지 않게 가슴 아픈 부분은 바로 엔딩타이틀이다. 특공대원은 물론이고 그들을 도왔던 레지스탕스들이 어떻게 됐는 지 사진과 함께 설명이 나온다. 대부분 처형, 자살 등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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