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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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울프팩 2021. 1. 3. 00:04

안국진 감독의 독립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년)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부조리를 머피의 법칙으로 풀어낸 블랙 코미디다.

그러면서 아주 재미있는, 잔혹하고 충격적이며 엽기적인 연쇄살인극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안고 있는 기본 테마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계층 간 갈등이 아니라 못 가진 자들 내부의 갈등이다.

갈등의 시발점은 부동산이다.

 

재개발에 목숨을 건 동네 사람들이 재개발 지역 포함 여부를 놓고 벌이는 갈등과 대립을 다루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은 기저에 깊이 깔려있는 부동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주인공 수남(이정현)은 세상에 이토록 불행한 여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운이 연속되는 인물이다.

 

하루에 몇 가지 일을 하며 힘들게 돈을 버는 수남은 마치 머피의 법칙을 상징하는 존재 같다.

듣지 못하는 남편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장애인이 되고 급기야 자살시도 끝에 식물인간이 된다.

 

수남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한 남편의 선택은 거꾸로 수남을 점점 더 빈곤과 고난으로 몰아넣는다.

마치 인디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불행히도 삶은 계속되었다'라는 노래처럼 고난의 연속이다.

 

과연 내가 저런 입장이라면 그만큼 억척스럽게 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남은 힘들게 산다.

남편의 병원비에 짓눌려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수남에게 마치 구원처럼 재개발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재개발에 편입되지 못한 동네 사람들이 반대를 하면서 수남이 원치 않는 갈등 구조가 벌어진다.

불행과 역설의 연쇄반응처럼 이어지는 이 과정을 감독은 꽤나 짜임새 있게 잘 묘사했다.

 

특히 극한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을 잔혹하면서도 황당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지하실에 갇힌 수남에게 스팀다리미로 가하는 고문과 수남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처럼 잔혹한 B급 영상으로 묘사됐다.

 

그렇다고 수남은 킬 빌처럼 여전사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한없이 불쌍하고 여리게만 보인다.

 

그래서 수남이 킬 빌의 여전사처럼 순식간에 벌이는 담대한 행동이 역설적이면서도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캐릭터가 명료하게 살아 있고 배역을 제대로 살린 이정현의 연기 또한 훌륭했다.

 

더불어 각본을 직접 쓴 안 감독의 시나리오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한꺼번에 닥치는 불행과 이를 이겨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수남이 본의 아니게 첫 번째 살인을 벌이는 과정은 황당한 우연에서 출발한다.

 

하필 수남이 던진 불붙은 종이뭉치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썩 자연스럽지는 않다.

더불어 일부 장면들은 설명 부족으로 관객이 이해하기 힘들다.

 

느닷없이 나타나는 다리미나 세탁기 장면 등은 DVD 타이틀에 수록된 감독의 음성해설을 듣지 않으면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상담소 여소장과 세탁소 주인의 관계도 설명이 부족해서 애매모호한 추측을 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훌륭하다.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가 뛰어난 구성과 캐릭터 설정,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명확하게 살아 있다.

 

DVD 타이틀로만 출시됐는데 블루레이 타이틀로도 나왔으면 좋겠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무난한 화질이다.

 

윤곽선에 계단 현상이 보이고 지글거림이 나타나며 색감도 바랜 것처럼 보인다.

음향은 돌비 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한다.

 

부록으로 감독과 이석준 촬영감독, 이정현이 함께 한 음성해설, 배우와 감독 인터뷰, 콘티 비교, 포스터 촬영 영상 등이 들어 있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안 감독은 손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몇 년만 더 일해서 집사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현실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작품을 구상했다.
극 중 등장하는 글씨는 이정현이 일부러 유아처럼 썼다. 인공와우 수술 소개 영상에 등장하는 내레이션도 이정현의 목소리다.
이정현은 박찬욱 감독이 대본을 읽은 뒤 근래 읽은 대본 중 최고라며 권해서 출연하게 됐다. 촬영은 레드원과 알렉사 카메라 2대를 동시에 사용했다.
이정현은 자전거도 잘 타지 못해서 현장에서 급히 배운 뒤 스쿠터를 천천히 타고 연기했다.
극 중 등장하는 TV 속 흑백영화는 러시아 혁명의 시초가 된 사건을 다룬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전함 포템킨'이다. 오래된 작품이어서 저작권료를 내지 않아도 돼 선택했다.
이정현은 세탁소 지하실 장면 촬영시 먼지가 너무 많아 한쪽 눈에 실핏줄이 터져 충혈됐다. 제작진은 이정현의 부상이 장면 분위기와 너무 어울려 촬영을 중단하지 않고 몇 장면을 더 찍었다.
다리미, 세탁기 등 세탁소 기기들을 이용한 고문 장면이 충격적이다. 제작진은 예산부족으로 영화 '소셜포비아'와 세트장을 공유했다.
종이 딱지를 날려서 눈에 꽂는 장면은 마치 '킬 빌'같다. 이정현은 이 작품으로 제36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탔다.
안감독은 처음부터 순수와 광기가 뒤섞인 여주인공으로 이정현을 염두에 뒀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발맛사지해 주는 장면, 의사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겠다는 수남의 대사 등은 성적인 뉘앙스를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