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나온 소위 '호스티스물'에 대한 편견이 하나 있다.
바로 야하다는 것.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것보다 하면 안되는게 더 많았던 서슬퍼런 독재정권 시절인 만큼 여자들의 속옷만 보여도 거의 포르노처럼 입소문을 탔다.
물론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흥행을 노리고 싸구려로 찍어낸 호스티스물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호스티스물의 효시를 이룬 작품이 바로 김호선 감독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다.
당시 TV에 갓 얼굴을 내민 신인 탤런트였던 염복순을 일약 스타로 만든 이 작품은 매춘부를 다루긴 했지만 결코 포스터처럼 야한 영화가 아니라 사회고발성 메시지가 강한 드라마다.
이 작품은 도시와 공업 위주의 편향된 경제개발 논리에 밀려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순박한 농촌 여성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그렸다.
영자가 식모와 시다, 버스 차장을 거쳐 결국 사창가의 외팔이 창녀로 전락하는 과정은 개발이란 이름 아래 인권과 복지가 처참하게 무시되던 시절 노동력 착취를 통해 도시 빈민을 양산하는 시대상의 반영이다.
신인이었던 김호선 감독의 연출이 좋았고, 염복순 송재호 최불암 등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특히 탄탄한 이야기의 배경에는 원작인 소설가 조선작의 훌륭한 단편 소설과 더불어 소설가 김승옥이 각색한 대본이 있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 훌륭한 작품들을 쓴 김승옥은 이 작품을 통해 영화 대본에서도 일가견을 보였다.
무려 37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봐도 등장인물들을 통해 시대상을 훌륭하게 반영하며 재미까지 이끌어 낸 뛰어난 영화적 완성도에 재삼 감탄하게 된다.
2.3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HD텔레시네를 거쳐 새로 복원했지만 워낙 필름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화질이 떨어진다.
곳곳에 필름 손상 흔적이 보이고 윤곽선이 뭉개지며, 일부 장면은 음성과 영상이 약간 어긋난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모노를 지원하며 김 감독의 음성해설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DVD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이 작품은 1970년대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수출 100억불이 목표였던 당시 인권과 복지는 뒷전으로 밀려난 채 노동착취가 만연했고, 급격한 도시화의 부작용인 이농현상으로 도시 빈민을 양산했다.
한켠으론 일본인들의 돈을 빼내기 위해 기생관광으로 윤락을 조장하는 바람에 숱한 여성들이 호스티스가 됐다. 공돌이 공순이 양공주 등 하층민들을 묘사하는 말들이 모두 이때 생겨났다.
70년대에는 남의 집에 기거하며 밥과 청소 빨래 등을 하는 식모가 있었다. 젊은 여성들을 기용하다보니 주인집 아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잘사는 집은 요리를 잘하는 나이든 여성을 찬모로 두기로 했다.
영자가 식모살이 하는 집은 당시 유일하게 촬영용으로 빌려주던 한남동의 양옥집이었다. 당시 한국 영화의 절반 가까이 이 집에서 영화를 찍었다.
원작을 각색해 대본을 쓴 소설가 김승옥은 영화에 대한 열정이 높아서 김 감독과 잘 어울렸다. 그들은 이 영화를 위해 당시 '종 3'으로 통하던 종로 3가의 사창가를 찾아가 직접 사람들을 만나 취재도 했다. 지금은 종로 3가 사창가가 없어졌지만 80년대만 해도 약간 남아 있었다.
외팔이가 돼서 창녀로 전락한 주인공 영자 역은 당시 신인 탤런트였던 염복순이 맡았다. 당시 김 감독은 TV에서 우연히 가정부로 나온 염복순을 보고 발탁을 했으나, 제작진은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 소위 트로이카를 쓰고 싶어 반대했다. 도식화된 스타대신 신인을 원했던 김 감독은 제작진과 다투느라 3개월 동안 촬영을 못했고 감독에서 잘릴 뻔 하기도 했다.
청계피복노조의 전태일 열사로 상징되던 청계천 의류 공장 노동자들은 보통 허드렛일부터 하는 시다로 출발한다. 허리를 다 펴기 힘들 만큼 낮은 천장의 다락방에서 이들은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리며 옷을 만들었다.
영자의 고향 언니로 나온 여인은 '바닷가에서' '마지막 외출' 등을 부른 1960년대 인기가수 쟈니 윤의 부인 박윤영이다. 그는 이 작품이 첫 출연작이다.
1970년대는 물론이고 80년대 초반만 해도 버스 차장이 있었다. 주로 젊은 여성이었던 버스 차장은 요금을 받고 억지로 사람들을 밀어 넣는 일을 했다. 그렇다 보니 영화 장면처럼 사람을 하나라도 더 태우려고 소위 '개문발차', 즉 문을 열어 놓은 채 버스가 달리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해서 사고가 많이 났다.
영자도 버스에서 굴러 떨어져 한쪽 팔을 잃게 된다. 잘린 팔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일종의 상징적인 표현주의 영상이다.
1970년대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를 매일 아침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새마을 노래로 대표되는 새마을 운동의 골자는 가난의 상징인 시골 초가집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자살을 결심한 영자 앞에서 기차가 멈추는 장면은 실제 승객이 가득 찬 운행 중인 기차를 사정해서 세우고 촬영.
창수(송재호)는 공장 노동자인 공돌이로 일하다가 월남전을 다녀온 뒤 목욕탕 때밀이로 들어가서, 보일러공을 연기한 최불암과 함께 지낸다. 20대 청년을 연기한 송재호는 당시 30대였으며, 이 작품으로 5년 동안 슬럼프에서 벗어나 재기했다.
김 감독이 리얼 영상을 고집하는 바람에 '588'로 통하던 실제 청량리 사창가에서 촬영. 그 바람에 사창가 깡패들이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염복순은 턱에 점과 살짝 벌어진 앞니가 특징이었다. 김 감독은 염복순이 살짝 벌어진 앞니 때문에 백치미가 있다고 생각해 캐스팅했다. 뒤로 1960년대 대배우인 도금봉이 보인다.
염복순은 외팔이 연기를 위해 한쪽 팔을 등 뒤로 돌려 묶고 촬영. 70년대에는 개봉일을 미리 정해놓고 영화를 찍었다. 이 작품은 75년 구정때 을지로 4가 국도극장에서 개봉 예정이어서 45일만에 찍었고, 김 감독은 시사도 보지 못한 채 개봉했다. 배우와 제작진도 하루 2,3시간씩 자며 촬영했다.
김 감독은 송재호가 영자의 등을 밀어주고 손톱을 깎아주는 장면을 인간미가 느껴져서 가장 좋아한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 주인공과 처지가 비슷했던 공돌이 공순이 매춘부들이 많이 봤단다.
제목은 영자같은 사람들을 만든 위선자들을 비꼬기 위한 반어법이다. 삽입곡 '이젠 가야지'는 70년대 인기가수였으나 요절한 최병걸이 불렀고, '너무 많아요'와 '그림자'는 임희숙이 노래했다.
이 작품은 1974년 '환녀'로 데뷔한 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 당시 무명의 신인이었던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조선작의 원작 소설은 영화와 결말이 달라서 사창가에 발생한 원인모를 화재로 영자가 타죽는다.
70년대 동네 복덕방 풍경. 사람 한 둘 들어갈 만한 작은 쪽방에 전화와 달력 하나 달랑 걸고 지도도 없는 부동산이 많았다. 실제로 영화 포스터를 안에 붙인 집도 있었는데, 저렇게 극장에서 포스터를 붙일 경우 입장권을 주고 갔다.
경복궁 앞. 멀리 한국일보 사옥이 보인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2000년대 초반까지 저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지금은 광장으로 바뀌면서 사라진 시청 앞 분수대. 나가라고 손짓하며 달려오는 '교통순경'은 실제 경찰이다. 김 감독은 리얼 영상을 위해 실제 경찰에게 "저기 사람이 들어가 있다"고 일러준 뒤 달려가는 모습을 몰래 찍었다.
서울역 근처 염천교 다리에서 찍은 장면. 태창흥업은 이 작품이 흥행하자 그 해 9월 '속 영자의 전성시대'를 만들려고 했으나 원작자인 조선작씨와 저작권 마찰을 빚어 '창수의 전성시대'란 제목으로 영화를 찍었다. 김사겸 감독이 만든 '창수의 전성시대'는 75년 말 국도극장에서 개봉했으나 3만명 입장에 그쳤다.
허허벌판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이 동네는 바로 여의도다. 영자는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인 이 곳에서 소위 '함바집', 즉 건설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밥집을 한다. 밥집은 영자가 어려움을 딛고 스스로 일으킨 삶을 상징한다.
당시 40대였던 이순재가 영자의 남편 역으로 반짝 출연. 주로 남자 배우들은 자기 목소리로 연기했고 염복순은 더빙을 했다.
포니, 브리사, 코로나로 기억되는 70년대 자동차들이 보인다. 결국 '속 영자의 전성시대'는 1982년 심재석 감독이 제작했고, 87년 유진선 감독이 선우일란을 기용해 '87 영자의 전성시대'를 찍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영화계에서 '영자의 전성시대'란 제목이 갖는 상징성이 컸다.
1952년생인 염복순은 MBC 탤런트 3기생으로 출발. 그는 '영자의 전성시대' 이후 2,3년간 이렇다할 히트작이 없어 공백기를 가진 뒤 서인석과 함께 KBS 드라마 '기러기'의 주연을 맡아 다시 브라운관에 복귀했고 이후 몇 편의 드라마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