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띠 해에 태어난 병약한 소년 ]
이소룡은 용띠 해인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병원에서 경극 배우인 이해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진번, 이를 미국 간호사가 영문 출생 신고서에 브루스라는 이름으로 적었다.
그렇게 전설의 스타 브루스 리가 탄생했다.
소룡이라는 예명은 나중에 누이동생이 붙여줬다.
이소룡은 어려서 병약하고 비쩍 마른 아이였다.
심지어 몽유병도 있었고,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다가 근시가 돼 6세때부터 안경을 썼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가족은 홍콩으로 옮겼고, 어려서부터 끼가 다분했던 그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다 24편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명문 사립중학교 시절에는 불량 서클을 만들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12세때, 그는 패거리를 믿고 싸움을 벌였다가 쿵푸를 배운 아이에게 심하게 얻어 맞았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졸라 태극권을 배운 이소룡은, 13세때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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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에 올린 사진은 모두 '용쟁호투' 블루레이에서 리뷰를 위해 캡처한 사진입니다. 무단으로 퍼가지 말아주세요.)
[ 영춘권의 대부 엽문을 통해 쿵푸에 입문 ]
바로 영춘권의 대부 엽문이다.
영춘권의 특징은 공격 거리를 짧게 하기 위해 상대와 가장 가까운 곳부터 공격한다.
발차기도 상대의 허리 위로는 차지 않는다.
그만큼 영춘권은 움직임이 빨라야 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영춘권을 배운 뒤 이소룡은 숱하게 길거리 싸움을 하며 실전을 익혔다.
이소룡은 또 당랑권, 응권, 홍가권 등 각종 무술과 함께 차차차 댄스도 배웠다.
워낙 균형잡힌 몸과 움직임이 탁월하게 빨랐던 그는 58년 댄스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싸움과 춤에만 미친 아들을 걱정한 아버지는 59년에 이소룡을 미국으로 보냈다.
웨이터 등 잡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는 우연히 쿵푸 시범을 보인 것을 계기로 시애틀에 도장을 차렸다.
이때 숱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을 제자로 받았으며 부인 린다 에머리도 그의 제자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을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중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친다는 이유였다.
그때부터 미국내 중국 무술인들과 이소룡의 갈등이 시작됐다.
미국내 중국 무술협회는 이소룡을 쫓아내기 위해 대표를 뽑아 파견했다.
대결에서 지는 쪽이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나 중국 무술 대표는 이소룡에게 흠씬 얻어맞고 두말없이 물러갔다.
그때부터 이소룡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측불허의 상대를 효율적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실전 무술을 고민한다.
[ 신체결함으로 미군 징병검사서 불합격 ]
이소룡은 61년, 워싱턴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60년대는 베트남전이 한창때여서, 이소룡도 미군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징집 신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고환이 음낭으로 내려오지 않는, 고환 정체증 때문이었다.
그는 무술에 전념하기 위해 64년에 미련없이 대학을 중퇴했다.
이때 그는 국제 가라테 선수권대회에 나가 그 유명한 1인치 펀치와 두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선보인다.
1인치 펀치란 1인치, 즉 불과 2.5cm 거리에서 온 몸의 기를 끌어모아 상대를 가격하는 기술이다.
얼핏보면 손으로 톡치는 것 같지만 상대는 몇 미터를 날아간다.
개인적으로, 1인치 펀치 시범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수년 전 국내 유일의 절권도장 취재차 강남역 도장을 방문했다.
이소룡 제자에게 절권도를 배운 관장이 운영하는 곳으로, 배우 김수로와 장혁이 다닌 도장이었다.
관장은 제자였던 배우 장혁을 불러내 1인치 펀치로 쓰러트리는 시범을 보여줬다.
가벼운 손놀림에 장혁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참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가라테 대회 참가는 이소룡에게 배우의 길을 열어줬다.
대회를 참관한 TV PD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받아 스크린 테스트를 제의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소룡은 유명한 TV시리즈물 '그린호넷'에서 주인공의 동료 겸 운전수 카토로 출연했다.
그린호넷은 쿵푸를 서양에 처음 소개한 TV물이다.
그린호넷은 정작 주인공보다 조연인 이소룡이 더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연예계는 장벽이 너무 높아 중국인이 절대 주연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 이소룡의 무술 '절권도' 창안 ]
그린호넷이 끝나고 공백기에 이소룡은 실전 무술인 절권도(截拳道)를 만들었다.
절권도란 말그대로 상대의 주먹을 차단하는 무술이다.
절권도의 핵심은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해 공격을 막고, 집중력을 흩어놓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소룡은 다양한 무술과 격투기를 받아들였다.
특히 무하마드 알리의 현란한 발놀림을 주목했다.
권투와 프랑스의 사바트, 무에타이, 유도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절권도의 사상을 다듬기 위해 숱한 철학서적을 읽었고, 크리슈 나무르티에 심취했다.
절권도를 본격 연마하면서 제자이자 동료인 댄 이노산토에게서 이소룡의 상징이 된 쌍절곤을 배웠다.
하지만 이소룡은 댄 이노산토보다 쌍절곤을 더 잘 다뤘다.
이소룡은 LA에 절권도장을 차렸고, 여기에 대배우 스티브 맥퀸과 제임스 코번, 액션배우 척 노리스, 미 프로농구팀 LA레이커스의 유명 센터 카림 압둘 자바 등이 제자로 들어 왔다.
유명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이소룡을 스위스까지 불러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소룡은 제자들에게 도복 대신 평상복을 입도록 했다.
실제 싸움은 도복을 차려입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소룡은 이 같은 철학을 유작 '사망유희'에서 노란 트레이닝복으로 선보인다.
그는 도복에 얽매여 무술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편하고 신축성 좋은 노란 트레이닝복을 골랐다.
지금은 이소룡의 상징이 된 노란 트레이닝복에 이처럼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소룡은 역기를 들다가 척추의 천골 신경을 심하게 다쳤다.
운동은 고사하고 일어설 수 조차 없어 한동안 누워서 지냈다.
이소룡은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소룡은 외부 사람들에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만성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
[ 절권도 알리기 위해 영화를 선택 ]
이소룡은 절권도를 알리기 위해 영화를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높은 벽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할리우드에 실망한 그는 마침 홍콩의 골든하베스트를 설립한 레이몬드 쵸 사장의 제안으로 홍콩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하고, 유명한 '당산대형'을 촬영했다.
그때부터 이소룡의 시대가 열렸다.
홍콩에서 찍은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단 3편으로 이소룡은 아시아의 스타가 됐다.
마침 닉슨의 핑퐁 외교로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동양 문화에 관심이 일면서, 미국 메이저 영화사인 워너브라더스가 쿵푸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이소룡에게 '용쟁호투'를 제의했다.
이소룡은 유작인 '사망유희' 촬영을 뒤로 미루고 '용쟁호투' 촬영을 끝냈으나 개봉을 보지 못했다.
그는 홍콩에서 '용쟁호투' 더빙 도중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영국 의사들은 뇌가 부어오르는 뇌부종이 너무 심해 그가 죽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소룡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가족과 함께 LA로 돌아가 종합 검진을 받은 결과 원인 불명의 뇌부종 진단을 받았다.
[ 날벼락 같은 죽음 ]
다행히 회복되자 이소룡은 '사망유희' 완성을 위해 홍콩으로 돌아갔다.
1973년 7월20일, 이소룡은 레이몬드 쵸 사장과 함께 염문설 상대였던 여배우 베이 팅 페이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쵸 사장이 돌아간뒤 이소룡은 두통이 일어나자 페이가 준 에콰제직 성분의 두통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페이는 아무리 깨워도 이소룡이 일어나지 않자 구급차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사인은 에콰제직 성분에 대한 과민반응이 유발한 뇌부종이었다.
이소룡의 뇌는 1,400그램에서 죽기 직전 1,575그램까지 빠르게 부어 올랐다.
하지만 이소룡의 모친과 그의 동생 로버트 리 등은 이소룡이 살해됐다고 믿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소룡은 영화의 엄청난 흥행 성공 후 삼합회 등 당시 홍콩 영화계와 밀착관계였던 중국 갱단이 끊임없이 접촉해 왔으나, 이를 모두 뿌리쳐 신변이 불안한 상태였다.
홍콩 장례식에는 홍콩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
그러나 불륜 상대였던 베이 팅 페이는 홍콩 장례식장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족들은 이소룡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곳으로 생각한 시애틀의 에이크뷰 공동묘지에 그를 안장했다.
미국 장례식에는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댄 이노산토 등이 참석해 관을 운구했다.
이소룡은 용띠 해인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병원에서 경극 배우인 이해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진번, 이를 미국 간호사가 영문 출생 신고서에 브루스라는 이름으로 적었다.
그렇게 전설의 스타 브루스 리가 탄생했다.
소룡이라는 예명은 나중에 누이동생이 붙여줬다.
이소룡은 어려서 병약하고 비쩍 마른 아이였다.
심지어 몽유병도 있었고,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다가 근시가 돼 6세때부터 안경을 썼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가족은 홍콩으로 옮겼고, 어려서부터 끼가 다분했던 그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다 24편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명문 사립중학교 시절에는 불량 서클을 만들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12세때, 그는 패거리를 믿고 싸움을 벌였다가 쿵푸를 배운 아이에게 심하게 얻어 맞았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졸라 태극권을 배운 이소룡은, 13세때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다.
* play 표시가 있는 사진은 play 버튼을 누르면 관련 동영상이 나옵니다. *
(이 포스트에 올린 사진은 모두 '용쟁호투' 블루레이에서 리뷰를 위해 캡처한 사진입니다. 무단으로 퍼가지 말아주세요.)
[ 영춘권의 대부 엽문을 통해 쿵푸에 입문 ]
바로 영춘권의 대부 엽문이다.
영춘권의 특징은 공격 거리를 짧게 하기 위해 상대와 가장 가까운 곳부터 공격한다.
발차기도 상대의 허리 위로는 차지 않는다.
그만큼 영춘권은 움직임이 빨라야 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영춘권을 배운 뒤 이소룡은 숱하게 길거리 싸움을 하며 실전을 익혔다.
이소룡은 또 당랑권, 응권, 홍가권 등 각종 무술과 함께 차차차 댄스도 배웠다.
워낙 균형잡힌 몸과 움직임이 탁월하게 빨랐던 그는 58년 댄스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싸움과 춤에만 미친 아들을 걱정한 아버지는 59년에 이소룡을 미국으로 보냈다.
웨이터 등 잡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는 우연히 쿵푸 시범을 보인 것을 계기로 시애틀에 도장을 차렸다.
이때 숱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을 제자로 받았으며 부인 린다 에머리도 그의 제자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을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중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친다는 이유였다.
그때부터 미국내 중국 무술인들과 이소룡의 갈등이 시작됐다.
미국내 중국 무술협회는 이소룡을 쫓아내기 위해 대표를 뽑아 파견했다.
대결에서 지는 쪽이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나 중국 무술 대표는 이소룡에게 흠씬 얻어맞고 두말없이 물러갔다.
그때부터 이소룡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측불허의 상대를 효율적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실전 무술을 고민한다.
[ 신체결함으로 미군 징병검사서 불합격 ]
이소룡은 61년, 워싱턴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60년대는 베트남전이 한창때여서, 이소룡도 미군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징집 신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고환이 음낭으로 내려오지 않는, 고환 정체증 때문이었다.
그는 무술에 전념하기 위해 64년에 미련없이 대학을 중퇴했다.
이때 그는 국제 가라테 선수권대회에 나가 그 유명한 1인치 펀치와 두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선보인다.
1인치 펀치란 1인치, 즉 불과 2.5cm 거리에서 온 몸의 기를 끌어모아 상대를 가격하는 기술이다.
얼핏보면 손으로 톡치는 것 같지만 상대는 몇 미터를 날아간다.
개인적으로, 1인치 펀치 시범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수년 전 국내 유일의 절권도장 취재차 강남역 도장을 방문했다.
이소룡 제자에게 절권도를 배운 관장이 운영하는 곳으로, 배우 김수로와 장혁이 다닌 도장이었다.
관장은 제자였던 배우 장혁을 불러내 1인치 펀치로 쓰러트리는 시범을 보여줬다.
가벼운 손놀림에 장혁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참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가라테 대회 참가는 이소룡에게 배우의 길을 열어줬다.
대회를 참관한 TV PD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받아 스크린 테스트를 제의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소룡은 유명한 TV시리즈물 '그린호넷'에서 주인공의 동료 겸 운전수 카토로 출연했다.
그린호넷은 쿵푸를 서양에 처음 소개한 TV물이다.
그린호넷은 정작 주인공보다 조연인 이소룡이 더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연예계는 장벽이 너무 높아 중국인이 절대 주연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 이소룡의 무술 '절권도' 창안 ]
그린호넷이 끝나고 공백기에 이소룡은 실전 무술인 절권도(截拳道)를 만들었다.
절권도란 말그대로 상대의 주먹을 차단하는 무술이다.
절권도의 핵심은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해 공격을 막고, 집중력을 흩어놓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소룡은 다양한 무술과 격투기를 받아들였다.
특히 무하마드 알리의 현란한 발놀림을 주목했다.
권투와 프랑스의 사바트, 무에타이, 유도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절권도의 사상을 다듬기 위해 숱한 철학서적을 읽었고, 크리슈 나무르티에 심취했다.
절권도를 본격 연마하면서 제자이자 동료인 댄 이노산토에게서 이소룡의 상징이 된 쌍절곤을 배웠다.
하지만 이소룡은 댄 이노산토보다 쌍절곤을 더 잘 다뤘다.
이소룡은 LA에 절권도장을 차렸고, 여기에 대배우 스티브 맥퀸과 제임스 코번, 액션배우 척 노리스, 미 프로농구팀 LA레이커스의 유명 센터 카림 압둘 자바 등이 제자로 들어 왔다.
유명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이소룡을 스위스까지 불러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소룡은 제자들에게 도복 대신 평상복을 입도록 했다.
실제 싸움은 도복을 차려입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소룡은 이 같은 철학을 유작 '사망유희'에서 노란 트레이닝복으로 선보인다.
그는 도복에 얽매여 무술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편하고 신축성 좋은 노란 트레이닝복을 골랐다.
지금은 이소룡의 상징이 된 노란 트레이닝복에 이처럼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소룡은 역기를 들다가 척추의 천골 신경을 심하게 다쳤다.
운동은 고사하고 일어설 수 조차 없어 한동안 누워서 지냈다.
이소룡은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소룡은 외부 사람들에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만성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
[ 절권도 알리기 위해 영화를 선택 ]
이소룡은 절권도를 알리기 위해 영화를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높은 벽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할리우드에 실망한 그는 마침 홍콩의 골든하베스트를 설립한 레이몬드 쵸 사장의 제안으로 홍콩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하고, 유명한 '당산대형'을 촬영했다.
그때부터 이소룡의 시대가 열렸다.
홍콩에서 찍은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단 3편으로 이소룡은 아시아의 스타가 됐다.
마침 닉슨의 핑퐁 외교로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동양 문화에 관심이 일면서, 미국 메이저 영화사인 워너브라더스가 쿵푸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이소룡에게 '용쟁호투'를 제의했다.
이소룡은 유작인 '사망유희' 촬영을 뒤로 미루고 '용쟁호투' 촬영을 끝냈으나 개봉을 보지 못했다.
그는 홍콩에서 '용쟁호투' 더빙 도중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영국 의사들은 뇌가 부어오르는 뇌부종이 너무 심해 그가 죽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소룡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가족과 함께 LA로 돌아가 종합 검진을 받은 결과 원인 불명의 뇌부종 진단을 받았다.
[ 날벼락 같은 죽음 ]
다행히 회복되자 이소룡은 '사망유희' 완성을 위해 홍콩으로 돌아갔다.
1973년 7월20일, 이소룡은 레이몬드 쵸 사장과 함께 염문설 상대였던 여배우 베이 팅 페이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쵸 사장이 돌아간뒤 이소룡은 두통이 일어나자 페이가 준 에콰제직 성분의 두통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페이는 아무리 깨워도 이소룡이 일어나지 않자 구급차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사인은 에콰제직 성분에 대한 과민반응이 유발한 뇌부종이었다.
이소룡의 뇌는 1,400그램에서 죽기 직전 1,575그램까지 빠르게 부어 올랐다.
하지만 이소룡의 모친과 그의 동생 로버트 리 등은 이소룡이 살해됐다고 믿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소룡은 영화의 엄청난 흥행 성공 후 삼합회 등 당시 홍콩 영화계와 밀착관계였던 중국 갱단이 끊임없이 접촉해 왔으나, 이를 모두 뿌리쳐 신변이 불안한 상태였다.
홍콩 장례식에는 홍콩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
그러나 불륜 상대였던 베이 팅 페이는 홍콩 장례식장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족들은 이소룡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곳으로 생각한 시애틀의 에이크뷰 공동묘지에 그를 안장했다.
미국 장례식에는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댄 이노산토 등이 참석해 관을 운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