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때문에 몇 번 찾아간 중국은 놀라운 나라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성의 규모와 끝없이 이어지는 만리장성 길이에 놀랐고, 끝간데 없이 시퍼런 물길이 경이로움과 공포감을 동시에 주는 '소계림' 용경협에 압도됐다.
이강(離江)이 감싸고 도는 계림에서는 수려한 풍광에 놀랐고, 곰과 호랑이 1,000여마리를 풀어 놓은 웅호산장에서 본 호랑이가 소를 산 채로 잡아먹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심한 공해와 호텔 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황사, 도대체 무엇이 진품인 지 알 수 없을 만큼 넘쳐 나는 짝퉁의 물결도 중국이 준 놀라움이었다.
1970년대식 촌스러운 대화와 연애담
조정래 작가의 세 권짜리 베스트셀러 소설 '정글만리'에서 다룬 정글은 바로 현대의 중국이다.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철저하게 중국을 시장으로 보고 접근한 책이다.
그렇다보니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상술이 복잡하게 얽혀도는 중국은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예측불허의 정글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기준이 통하지 않기 때문.
소위 권력자들과 맺은 인연이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꽌시 문화부터 소위 '얼나이'로 부르는 여러 명의 여자를 줄줄이 거느린 관리들의 축첩과 부패 등 중국 만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풀어 놓았다.
더불어 나이트 문화까지 곁들였으니, 이런 현상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깊이가 얕은 표면적인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실제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
책에서는 종합상사맨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쳤지만 종합상사 시대는 1970,80년대 이야기다.
지금은 제조업체들이 해외에 공장과 법인을 두고 직접 영업까지 다 한다.
삼성물산 LG상사 등 종합상사들은 발전사업, 자원개발 등 생존을 위해 다른 영역을 파고 있다.
그만큼 작가의 사고와 관점이 1970, 80년대에 머물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베이징대 유학생 재형과 리옌링이 펼치는 연애담이다.
마치 고층빌딩 숲으로 변해버린 테헤란로에서 신성일과 안인숙이 '별들의 고향'을 찍는 것 같다.
1970년대 영화를 보는 것처럼 대화와 행동들이 어찌나 낯간지럽고 고색창연한 지 읽기 민망하다.
아마도 작가가 젊은 세대들과 소통을 많이 해보지 않았거나 무관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비단 젊은 연인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 대화의 상당 부분이 만연체로 길게 늘어지는 데다가 1970년대 영화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촌스럽다.
중국을 시장으로만 바라 본 소설의 한계
작가가 워낙 포스코와 인연이 깊어서 유일하게 포스코만 작품 속에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이 부분 또한 오래 전에 취재를 한 듯 실제와 약간 거리가 있다.
작품 속에서는 포스코가 일본업체들과 중국에서 치열한 철강 공급 싸움을 벌이는데, 지난해 전세계 철강 시장이 공급과잉으로 시달린 것은 중국 철강업체들이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즉, 최대의 적은 차고 넘치는 과잉공급으로 가격을 떨어 뜨리고 있는 중국 철강사들이다.
이밖에 화웨이 레노버 하이얼 등 세계 1위를 달리거나 넘보는 중국 업체들이 꽤 많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다룬 것처럼 중국이 비단 짝퉁산업만 발달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처럼 공급자 측면을 소홀히 한 채 시장의 관점에서만 중국을 바라본 점이 이 작품의 한계다.
물론 비즈니스 서적이나 중국 경제를 다룬 책이 아닌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겠지만 그렇더라도 내용이 표피적이다.
문제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진지함을 가장하고 있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어색하다는 점이다.
동방공정부터 중국의 문화 관습, 비즈니스와 시장이야기까지 너무 많은 것을 쏟아내려한 작가의 욕심이 지나친게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이 작품은 역사의 무게와 깊이가 느껴지는 작가의 전작 '태백산맥'의 느낌으로 접근할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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