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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블루레이)

울프팩 2021. 5. 17. 00:50

김초희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년)는 유쾌하면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내용은 영화 기획자로 살아가던 찬실(강말금)이 어느 날 제작 준비 중이던 영화감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실업자가 되는 이야기다.

 

찬실은 실업자가 된 뒤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본다.

영화 외에 아는 것은 없는데 영화제작사에서는 써주려고 하지 않으니 결국 호구지책으로 친한 여배우 소피(윤승아)의 가사 도우미 노릇을 한다.

 

새삼 찬실이는 신세한탄과 함께 계속 영화 관련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정체모를 러닝셔츠 바람의 자칭 장국영(김영민)과 불어 강사를 하며 영화 준비를 하는 감독(배유람), 셋집 할머니(윤여정), 소피 등이 엮이며 갖가지 우스우면서도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이 작품을 살린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 찬실이다.

꿈을 위해 노력하지만 만만치 않은 현실에 좌절과 슬픔, 고통을 맛보는 찬실은 녹녹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표상이다.

 

무엇보다 찬실이는 극단적이지 않아서 좋다.

무조건 잘 될 것이라며 마냥 희망을 부풀리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비관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그때그때 처해진 상황에 따라 좌절과 희망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힘들게 하루를 넘긴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꾸역꾸역 찾아간다.

 

그런 찬실의 모습 속에 수 많은 보통 사람들이 녹아 있다.

로또처럼 희망은 기약 없고 모든 것을 때려치우거나 갈아엎은 뒤 새로 시작할 용기와 자신은 없다.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는 적수공권(赤手空拳) 뿐이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이를 웅변하듯 보여 주는 찬실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매력적인 캐릭터다.

 

각본을 직접 쓰며 찬실이 캐릭터를 창조한 김 감독도 대단하지만 자연스러운 연기와 귀여운 부산 사투리로 찬실을 피부에 와 닿게 만든 강말금 배우의 공이 크다.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김 감독이 겪은 일들을 상당 부분 녹여 넣었기 때문이다.

 

홍상수 감독의 프로듀서로 오래 일하다가 40대에 실직자가 된 김 감독은 경험담을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에 많이 반영했다.

그러면서 감독은 꿈과 목표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는 다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때 소중하게 꿈을 키우며 간직했던 영화 서적들과 비디오를 버리기 위해 묶는 찬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살면서 꼭 꿈과 목표가 있어야 하는지 되묻는다.그렇다면 꿈과 목표를 잃었을 때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꿈과 희망이 결코 종착지가 돼서는 안 된다.

"난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라는 영화 속 할머니의 말은 목표를 두지 않아도 내가 만족하는 하루를 사는 것이 풍요롭고 성공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목표나 꿈이 아닌 아닌 매일의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라는 대사로 함축되는 충실하고 즐겁고 복된 일상이 삶의 목표가 돼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하루를 열심히 사는 찬실이는 제목처럼 많은 복을 가진 사람이다.

김 감독은 이런 메시지를 현실과 판타지가 적당히 섞인 기발한 구성으로 잘 전달했다.

 

찬실이의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을 다큐처럼 다뤘다면 영화는 무겁고 답답했을 수 있다.

여기에 장국영 귀신이라는 판타지 캐릭터를 섞어서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사랑스러우며 귀엽고 재미있게 묘사했다.

 

귀신이든 유령이든 찬실이가 만든 상상이든 장국영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힘든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이자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발상의 전환점 같은 존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멍 때리며 힘든 하루를 잊고 새로운 나날을 그리는 것처럼 찬실이의 장국영은 김 감독이 사람들에게 주는 안식처이자 선물인 셈이다.

그래서 장국영이라는 이질적인 캐릭터가 이물감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장국영뿐만 아니라 모든 시퀀스와 장면들이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아주 알찬 작품이다.

심지어 엔딩 크레디트에 흐르는 주제가조차도 알뜰하게 웃음을 선사한다.

 

'사설 방아타령'을 김 감독이 개사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주제가는 이희문이 열창했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윤곽선이 깔끔하고 안온한 색감이 포근하게 펼쳐진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적당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배경 음악들이 리어 채널을 가득 채운다.

부록으로 감독과 배우들의 음성해설, 홍보영상과 뮤직비디오 등이 들어 있다.

 

참고로 감독과 강말금이 주고받는 음성해설은 여러 군데서 웃음이 터질 만큼 재미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영화는 초반 1.33 대 1 화면비로 시작해서 1.85 대 1 화면비로 넘어간다. 김 감독이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해서 그의 영화처럼 4 대 3 화면비와 삼베천 위에 글자를 쓴 타이틀로 시작했다.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이삿짐을 나르는 장면은 김 감독이 대학시절 경험을 반영했다. 제작진은 사람들이 사는 집을 빌려 잠시 이사하게 한 뒤 가구를 모두 빼내고 새로 꾸며서 촬영 장소로 썼다.
찬실이를 맡은 강말금의 연기가 뛰어났다. 그는 회사를 다니다가 30세때 연기를 시작해 14년간 연극을 하며 내공을 쌓았다.
찬실이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장면도 감독의 경험담이다. 김 감독이 실직했을때 아버지는 5장의 손편지를 써보냈다. 거기에 아버지는 홍 감독 영화 별로였다며 쇼생크탈출 같은 영화 만들라고 썼다.
찬실이가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나온 목소리는 실제 김 감독 부친의 목소리다.
러닝셔츠와 팬티 바람의 장국영 귀신은 김영민이 구상해서 '아비정전' 속 장국영을 흉내냈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가 쓴 한 줄짜리 시가 인상적이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오래 살아 한글을몰랐던 할머니에게서 영감을 얻어 극 중 캐릭터를 구상했다.
원래 제목은 '눈물이 방울방울'이었다. 바꾼 제목이 더 낫다.
강말금은 자신의 아코디언을 들고 출연했다. 그는 극단 생활하며 모은 돈으로 아코디언을 사서 4,5년간 매일 30분씩 꾸준히 연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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