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칠수와 만수(블루레이)

울프팩 2022. 5. 8. 00:47

1988년은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해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3 호헌 조치로 장기 집권을 꾀했으나 국민들이 들고일어난 6.10 민주항쟁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치르면서 그 밥에 그 나물이긴 하지만 전두환과 군사 쿠데타를 함께 일으킨 노태우가 1988년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해 우리나라는 서울 올림픽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치렀다.

 

1988년의 기억 1: 서울 올림픽과 여행 자유화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독재정권을 대물림하면서 정치적 후진국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는데 올림픽으로 정치적 발돋움을 하며 이미지 쇄신을 꾀했다.

그런 점에서 88 올림픽은 성공적이었다.

 

이전까지 미소 냉전의 여파로 LA 올림픽과 모스크바 올림픽을 각각 공산권과 서방진영이 불참하는 반쪽짜리로 치렀으나 88 서울 올림픽은 처음으로 서방과 공산권 포함 160개국이 모두 참가해 진정한 올림픽이 됐다.

그래서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모든 것이 급격히 바뀌었다.

 

한마디로 개방과 쇄신의 물결이었다.

우선 여행 자유화를 들 수 있다.

 

1988년까지 우리 국민들은 해외여행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기업 출장, 유학, 해외 근무 등 특수 목적이 없으면 여권 발급을 해주지 않았다.

 

과소비를 막는다는 명분이었으나 성장 일변도의 기업 위주 경제정책을 펴면서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바람에 국민들이 해외여행을 갈 만큼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다.

정부는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자신감을 얻어 1989년부터 전면적으로 해외여행을 자유화했다.

 

물론 나가기 전에 5일 동안 신원 조회를 거쳐 문제가 없어야 여권이 발급됐고, 이후 하루 동안 반공정신교육을 받고 교육필증을 제출해야 했지만 처음으로 한반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대적 변화였다.

반공교육은 1992년에 폐지됐다.

 

1988년의 기억 2: 여러 신문 창간으로 이어진 언론 자유화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언론 자유화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11월 허문도 대통령 공보비서관 주도로 언론 통폐합 조치를 단행해 전국의 언론사들을 몇 개만 남기고 강제로 없애 버렸다.

 

언론사들의 과다 난립과 지나친 경쟁을 막아 안정 성장을 추구한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헌법 개정으로 제2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갖는다'고 명문화되면서 언론 자유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덕분에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한겨레신문을 필두로 새로운 신문들이 창간됐고 서울경제신문 등 강제로 폐간됐던 신문들도 복간됐다.

여기에는 서울 올림픽을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한 정부의 속내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1988년의 기억 3: 영화 직배 제도의 명과 암

영화 애호가들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바로 영화 직배 조치다.

 

이전까지 외국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려면 반드시 국내 배급사를 거쳐 수입해야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제작 및 수상 실적 등을 토대로 국내 배급사에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점수, 즉 쿼터를 줬다.

 

이 같은 수입 쿼터제는 우리 영화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지만 한편으론 쿼터를 빌미로 제작 및 배급사를 정부의 입맛에 맞도록 길들이는 부정적 영향도 있었다.

역시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정부는 미국의 거대 배급사들이 국내에서 외화를 직접 개봉할 수 있도록 수입 쿼터제를 풀었다.

 

그 바람에 미국 직배사들이 연합해 1988년 UIP코리아를 설립해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위험한 정사'를 시작으로 외화의 국내 직접 배급을 시작했다.

영화인들은 가두시위와 함께 직배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뱀을 풀고 최루가스를 뿌리며 강하게 저항했지만 직배를 막지 못했다.

 

1988년의 기억 4: 5공 청문회와 심재철

그리고 1988년에 잊지 못할 사건은 5공 청문회다.

1972년 박정희 정권 때 10월 유신으로 사라진 국회의 국정 감사가 16년 만에 부활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12.12 군사쿠데타, 언론 통폐합과 일해재단 비리 등을 파헤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학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5공비리 특별위원회가 설치돼 속칭 '5공 청문회'가 열렸다.

 

당시 전두환, 장세동, 신현확 등 5공 군사쿠데타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거나 묵인한 정부 인사들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유찬우 풍산금속 사장 등 기업인들, 장기봉 전 신아일보 사장, 이재필 전 영남일보 사장 등 언론인들이 줄줄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때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사과 한마디 없이 퇴장하는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던지며 분노하고 증인들을 논리 정연한 말솜씨로 매섭게 몰아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문회 스타로 급부상했다.

 

TV로 생중계된 5공 청문회 시청률은 한때 80%를 넘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TV 생중계 장면 중 하나는 야당 측 증인으로 나온 당시 MBC 기자였던 심재철 전 국민의힘 의원이다.

 

그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직전 전국 대학생 10만여 명이 서울역 앞에 모여 계엄 해제 시위를 벌였는데 그때 대학 총학생회장단 대표를 맡았다.

해가 저물면서 그만두고 해산하느냐, 철야농성을 벌이느냐 토론을 벌였는데 심재철이 해산을 결정하면서 훗날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벌어졌다.

 

이는 두고두고 군부의 집권을 용이하게 해 준 패인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심재철은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훗날 기자가 돼서 청문회장에 선 심재철의 패기는 대단했다.

증인석에 앉은 그가 서울역 시위 상황을 설명하며 구호였던 "전두환, 신현확 살인마..." 운운하자 여당이었던 민정당 의원이 전 대통령과 국무총리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나 심재철은 "숱한 국민을 죽인 자들을 살인마라고 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라고 일갈했다.

그랬던 그가 너무도 다르게 변해버려 참으로 씁쓸하다.

 

1988년의 기억 5: 사람들-지강헌, 이상은, 신해철, 최병걸, 김인순

이밖에 1988년 벌어진 일 중에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이다가 자살한 탈옥수 지강헌 사건, 그리고 MBC 9시 뉴스 생방송 도중 웬 남자가 스튜디오에 난입해 앵커 마이크에 대고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말을 던지고 끌려나간 사건이 떠오른다.

 

또 1988년 열린 MBC 강변가요제에서 가수 이상은이 '담다디'를 불러 대상을 탔고, 연말에 열린 MBC 대학가요제에서는 신해철이 무한궤도라는 밴드로 나와 '그대에게'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맥도널드가 처음 한국에 상륙해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1호점을 냈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고, 가수 최병걸과 김인순의 죽음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으며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정치깡패 유지광의 사망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사다난하고 역사적 의미가 깊었던 1988년 박광수 감독의 사회성 짙은 영화 '칠수와 만수'가 개봉했다.

 

사회성 짙은 블랙 코미디

대만 소설가 황춘밍이 쓴 단편소설집 '사요나라 짜이젠'에 포함된 '두 페인트공'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간판을 그리는 가난한 두 청년이 등장하는 블랙 코미디다.

좌익사범으로 장기 복역 중인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묶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간판공 만수(안성기)와 그의 조수로 일하는 기지촌 출신의 찢어지게 가난한 밑바닥 청년 칠수(박중훈)가 어느 날 건물 꼭대기의 옥외 광고탑에 매달려 광고 그림을 그리다가 소주를 마시며 신세한탄을 한 것이 그만 화염병 시위로 오해받아 소동을 빚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칠수는 계층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여대생과 연애에 실패하고, 만수는 집안 환경 탓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울분이 쌓인다.

두 사람은 작업 중이던 높다란 간판 위에 올라가 소주 한 병 마시고 세상을 향해 울분을 토한다.

 

결국 그들이 쏟아내는 분노가 답답했던 당시 정치 사회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마치 사진첩을 넘기듯 1988년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대의 앨범 같은 타이틀

박 감독은 "영화는 도시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여주는 기록물"이라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건물 등 거리 풍경을 영상에 담았다.

덕분에 높은 건물이 많지 않던 서울 광화문 주변 거리 풍경과 자동차가 별로 없는 서울 강남의 한적한 도로 풍경, 지금은 사라진 민방위 훈련 모습과 방범대원들, 현대차에서 만든 포니 2와 주간지 선데이서울 등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아울러 너무나 젊디 젊은 안성기와 박중훈, 앳된 배종옥의 모습도 싱그럽다.

껄렁껄렁한 박중훈의 연기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배역과 잘 어울려 별스럽지 않다.

 

여기에 유영길 촬영감독의 안정된 카메라 움직임도 흡입력을 높였다.

음악은 록밴드 작은 거인을 이끌던 김수철이 맡아서 특유의 걸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영화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평범하다.

비교적 복원이 잘 돼서 윤곽선과 색상은 깔끔하지만 잡티와 스크래치 등 필름 손상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DTS HD MA 모노를 지원하는 음향은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치찰음이 잘 들리지 않는 등 대사 전달에 문제가 많다.

다행히 한글자막이 들어 있어 켜놓고 보면 좋다.

 

부록으로 박 감독과 김영진 평론가의 해설, 이미지 자료 모음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고맙게도 음성해설까지 한글 자막을 지원해 내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만수를 연기한 안성기. 원래 이 작품은 1986년 연극으로 먼저 국내에 선보였다. 당시 문성근, 강신일이 칠수와 만수를 연기했다.
연극 희곡의 경우 오종우와 이상우가 황춘밍이 쓴 단편 소설 '두 페인트공'을 각색했다.
지금은 중단된 민방위훈련. 사이렌이 울리면 자동차들도 길가에 모두 정지했고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췄다. 서울 서린동 한효빌딩(현 무역보험공사 건물)에서 광화문 사거리를 바라보고 찍은 장면. 한효빌딩 뒤로 광화문우체국, 건너편에 교보빌딩, 길거리에 포니 2 택시가 보인다.
여대생 지나로 나온 배종옥. 그는 이 작품이 영화 데뷔작이다. 박 감독은 데뷔작인 이 영화로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멀티플렉스로 바뀌면서 요즘은 극장 간판보기가 힘들어졌다. 과거 단관 극장 시절에는 이렇게 손으로 그린 간판들이 시선을 끌었다. 간판 작업 장면은 대한극장에서 촬영.
길건너 극장 간판에 톰 크루즈 주연의 '탑건'과 멜 깁슨이 나온 '리쎌 웨폰'이 보인다. 안성기와 문성근은 각각 만수 역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했다. 그런데 안성기 출연작을 많이 만든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 사장의 설득으로 안성기가 만수 역을 맡았다.
당시 연출부는 온갖 일을 다 처리했다. 포장마차 손님으로 나온 왼쪽 끝에 앉은 이현승 조감독은 안성기와 남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며 의상을 구했고 포스터 등 미술작업에도 참여했다. 당시에는 의상팀이 없어 배우들도 옷을 직접 구해서 입고 나왔다.
당시 제작사에서는 흥행을 고려해 칠수 역에 잘 생긴 배우를 원하며 박중훈 섭외에 반대했다. 그러나 박 감독은 잘 생기지 않은 평범한 얼굴을 원해 밀어 붙였다.
박 감독은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해 산소용접을 많이 해봐서 배우들에게 용접 방법을 알려줬다.
서울 명동에서 촬영한 간판 작업 장면. 높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안전장치 없이 배우들이 직접 올라가 연기했다.
만수의 동네는 서울 옥수동에서 촬영. 원래 소설가 최인석에게 각본을 맡겼으나 영화와 맞지 않아 일부만 남기고 박 감독이 대부분 다시 썼다.
인물의 얼굴 선을 명확하게 살린 촬영은 유영길 촬영감독의 솜씨다. 1998년 타계한 유 촬영감독은 1980년대 미국 방송사 CBS 서울지국에서 영상기자로 일했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 항쟁 보도영상을 촬영해 최초로 세상에 알린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지난해 제1회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을 사후에 받았다. 유 촬영감독이 이 사실을 얘기하지 않아 주변 지인들도 그가 광주 민주화 항쟁 보도영상을 촬영한 사실을 몰랐다.
만수가 부친을 면회하러 간 장면은 의정부 교도소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건물 외부에서만 촬영.
칠수와 만수가 옥상 광고탑에 그림을 그리는 건물을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옆에 있던 청록회관이다. 이 건물은 전두환 동생 전경환 소유였는데 구속되면서 주인이 바뀌어 촬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작진이 두 배우가 탄 곤돌라를 만들었다. 건물 건너편 아파트에 살던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들이 그림을 쳐다본다며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제작진은 구청 직원이 현장에 찾아와 그림을 지우라고 하는 바람에 광고탑 장면을 하루에 몰아 찍었다.
두 배우가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찻길에서 넘어지는 장면은 차량 통제없이 찍어 위험했다. 쓰러진 배우들이 뒤에 달려오는 차들을 살피는 장면은 실제 상황이다.
제작진은 원작자 황춘밍을 밝히지 않았다. 그가 대만에서 반체제 작가로 지목되는 바람에 국내 검열에서도 문제가 될까봐 원작자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광고탑 장면을 찍은 건물 10층에 카바레가 있었다. 그런데 경찰 복장의 배우들이 대거 나오면서 아줌마들이 카바레에 오지 않는 바람에 건달들이 찾아와 협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결국 카바레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동원해 건달들을 겨우 설득해서 촬영을 이어갔다.
유영길 촬영감독은 미국 CBS 서울지국의 영상기자 시절 1980년 5월19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에게 맞아 피를 흘리는 시민들과 장갑차로 위협하는 현장 등을 유일하게 촬영했다. 그는 '남부군' '하얀전쟁'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꽃잎' '초록 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을 찍었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주변이 지금과 달리 휑하다. 지금은 유명한 김형구 촬영감독이 이 작품에서 유영길 촬영감독의 조수였다.
만수가 뛰어내리는 장면은 조명이 맞지 않아 튀는 상황에서 실수로 찍혔다. 그런데 마치 TV중계화면처럼 보여 상황과 잘 맞다고 생각해 그냥 사용했다.
이 작품 개봉일이 하필 5공청문회 기간이어서 관객 동원에 영향을 받았다. 원래 엔딩을 교도소 면회 장면으로 하려고 했으나 촬영허가가 나지 않아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으로 급히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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