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26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한 중년 남성이 또다른 남성을 아무 이유없이 권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묻지마' 살인이다.
놀라운 것은 사건보다 피해자와 범인이다.
피해자는 LA올림픽 레슬링 부문 금메달리스트인 데이브 슐츠.
살해범은 놀랍게도 억만장자인 존 듀폰이었다.
바로 케블러라는 특수섬유를 개발한 세계적인 화학기업 듀폰의 창업주 4대손이다.
레슬링을 좋아해서 미국 레슬링협회를 적극 후원했던 존 듀폰은 엄청난 규모의 펜실베니아 자택에 레슬링 훈련장을 지어놓고 사설 레슬링팀까지 운영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데이브 슐츠를 코치로 초빙해 88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사설 레슬링팀의 훈련을 맡겼다.
그런데 왜 존 듀폰은 갑자기 데이브 슐츠를 죽였을까.
이를 다룬 것이 베넷 밀러 감독의 '폭스캐처'(Foxcatcher, 2014년)다.
제목인 폭스캐처는 존 듀폰이 이끌던 사설 레슬링팀명이다.
영화는 놀랍도록 흥미로운 사건을 내용 못지 않게 흥미로운 방식으로 다룬다.
요란한 액션이나 야한 정사 장면 없이 다큐멘터리처럼 아주 건조하고 담담하게 사건을 다루지만 치밀한 연출로 궁금증을 자아내며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화는 의외로 아주 고요하다.
레슬링 훈련이나 시합 장면 외에 이렇다 할 역동적인 장면이 많지 않지만 오히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오랜 시간 집요하게 잡으면서 보는 사람이 인물의 내면으로 파고들게 만든다.
이를 통해 감독은 한 인물의 내면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행동을 하며 극단적 선택을 했을지 인물의 표정, 행동 하나 하나를 쫓아가며 탐구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감정과잉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억지로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 차분한 영상이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보인다.
물론 실제 사건보다 이야기를 축약하거나 시대 순서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드라마를 강조한 측면이 있으나 이야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다.
이는 감독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베넷 밀러 감독은 '카포티' '머니볼' 등 실화를 바탕으로 다룬 영화를 만들 때 뛰어난 연출력을 발휘한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감독의 진지함 때문인 지 배우들 또한 실제 레슬링 선수들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사실적이다.
데이브 슐츠를 연기한 마크 러팔로는 물론이고 이 작품의 토대가 된 자서전을 쓴 데이브의 동생 마크 슐츠를 연기한 채닝 테이텀은 영락없는 레슬링 선수다.
아닌게 아니라 마크 러팔로는 학창시절 레슬링을 배우기도 했다.
여기에 이 작품을 빛낸 인물은 존 듀폰을 연기한 스티브 카렐이다.
그는 실제 존 듀폰보다 키는 작지만 높다란 코를 살리기 위해 특수 분장을 한 채 연기했다.
그가 빛난 것은 존 듀폰의 이상성격을 연기를 통해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다.
거만하게 내려다 보면서도 내면의 불안함을 간직한 채 지긋이 응시하는 눈빛 연기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다.
더불어 그레이프 프레이저가 촬영한 시적인 영상을 빼놓을 수 없다.
여백을 충분히 살린 그의 영상을 보면 인물들의 한없는 외로움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감독의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 훌륭한 영상이 결합된 이 영화는 한마디로 놀라운 작품이다.
1080p 풀HD의 1.85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우수하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과 자연스러운 색감이 선명하게 잘 살아 있다.
DTS 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액션물처럼 요란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 주지는 않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차분한 소리를 들려준다.
부록으로 들을 내용이 많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음성해설과 제작과정, 삭제장면 등이 수록됐다.
모두 HD 영상이며 음성해설을 제외하고 한글자막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마크 슐츠를 연기한 채닝 테이텀. 밀러 감독은 마크 슐츠의 자서전과 사건 기록 등을 토대로 7년 동안 영화를 준비했다.
데이브와 마크 슐츠 형제는 1984년 LA에서 열린 올림픽 레슬링 시합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땄다.
펜실베니아 뉴타운에 있는 존 듀폰의 집은 800에이커 규모였다. 제임스 메디슨의 집을 모델로 지었다고 한다.
존 듀폰이 폭스캐처 농장이라고 부른 자택 한 편에 지은 레슬링 연습장. 듀폰은 레슬링을 배운 적이 없으나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반발로 레슬링을 선택해 후원했다.
고교 시절 레슬링 선수였던 마크 러팔로는 특기생으로 대학 진학을 고려했을 정도였다.
집에 사격장까지 만들어 놨던 존 듀폰은 국가대표로 올림픽 사격 종목에 참가할 만큼 사격 실력이 출중했다. 문제는 집에서도 총을 갖고 다니며 훈련 중인 선수들 앞에서 총을 쏘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는 점이다. 경찰이 살인 사건을 저지른 그를 바로 체포하지 못한 것도 그의 뛰어난 사격 실력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존 듀폰은 실제로 장갑차를 장난감 수집하듯 사들였다. 여기에 기관총을 장치해 집 주위를 돌아다니며 토끼와 여우 등을 향해 무차별 사격했다. 한마디로 기벽과 기행을 일삼았다.
존 듀폰은 듀폰사를 설립한 엘로테 르이레네 듀폰의 고손자다. 창업자는 프랑스 명문 귀족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이후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만든 화약제조비법을 들고 미국으로 도망쳐 1802년 듀폰사의 전신인 화약공장을 세웠다. 이후 남북전쟁과 제 1차 세계대전 때 화약을 공급해 큰 돈을 벌어 '죽음의 상인'이란 별명이 붙게 됐다.
체중 계량 장면에서 측정관으로 잠깐 나온 인물이 실제 마크 슐츠다. 그는 88 서울올림픽때 기대와 달리 6위에 그쳤고 이후 은퇴해 UFC 선수를 하기도 했다.
존 듀폰은 아내의 목을 조르거나 흉기로 찌르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여 결혼 90일만에 이혼했다. 또 동성애적 성향도 있어서 성적 접촉을 거부한 레슬링 코치를 해고하기도 했다. 또 코카인을 자주 흡입했고 이를 선수인 마크 슐츠에게 권하기도 했다.
마크 러팔로가 쓴 안경은 실제 살해된 데이브 슐츠의 유품이다. 미망인이 흔쾌히 빌려줘 이를 소품으로 사용했다. 한 살 터울이었던 데이브와 마크 슐츠 형제는 영화와 달리 폭스캐처 농장에서 함께 산 적이 없다. 마크는 88 서울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 폭스캐처를 떠났고 이후 형인 데이브가 1989년에 들어와 살해당한 1996년까지 살았다.
88서울올림픽 장면. 듀폰의 후손들은 대부분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상속 재산을 나눠갖고 살았다. 그 중에 존 듀폰은 두 살때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1988년 어머니가 숨진 뒤 존 듀폰의 성격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존 듀폰은 미국 역사상 살인사건 범인 중에 가장 큰 부자였다. 존 듀폰은 법정에서 예수의 아들, 달라이 라마라고 주장해 변호사들이 정신질환이라고 변호했으나 법원은 30년형을 선고했고 복역중 2010년 12월10일 72세 나이로 옥사했다. 그는 폭스캐처 유니폼을 입혀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
존 듀폰은 살인 후 집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이틀동안 숨어 다녔다. 집이 어찌나 큰지 그를 쉽게 찾지 못한 경찰은 결국 보일러를 꺼서 이를 다시 켜기 위해 나오게 한뒤 체포했다. 이틀 동안 대치하는 모습은 TV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다. 아직까지 그의 살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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