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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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4K)

울프팩 2021. 7. 18. 13:51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분기점이 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 해다.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의 이탈이다.

 

중립을 견지하며 방관하던 미국은 독일이 유보트를 앞세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1915년에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키자 이를 빌미로 전쟁에 개입해 연합국에 군수물자를 대량 지원하다가 1917년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강대국인 미국의 참전은 좀처럼 기울지 않던 전쟁의 균형추를 대번에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 쪽으로 기울게 했고 이듬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이 항복하게 만들었다.

 

반면 러시아의 이탈은 좀 더 빨리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을 1918년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1917년 2월에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으로 케렌스키 정부가 들어서며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이후 혼란스러운 내전 상황 속에서 10월에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켜 집권한 레닌이 동맹국들과 휴전에 합의하며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 바람에 양쪽에 전선을 두고 힘들게 싸우던 독일은 한숨 돌려 동부전선 군대를 서부 전선 한 군데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1917년 이후 전쟁의 국면은 심각하게 요동쳤지만 정작 전선은 교착상태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특징인 참호전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선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합국과 동맹국이 길게 참호를 파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당시 전쟁의 주역은 기관총과 대구경의 장포신 대포였다.

 

제국주의 시대 전쟁의 특징인 일렬로 줄을 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던 돌격전 양상을 일거에 바꿔놓은 것이 기관총과 대포다.

공격 측은 사전에 각종 대포알을 마구 날려 적의 진지를 두드리고 돌격에 나섰으며 참호에 숨은 수비 측은 기관총으로 이들을 쓰러트렸다.

 

탱크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참호를 타 넘는 용도 외에 전쟁의 국면을 바꾸는데 한계가 있었고 전투기는 손으로 폭탄을 집어던지는 수준이어서 전술 폭격이나 전략 폭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결국 두더지처럼 참호에 숨어 총질을 하는 답답한 전황을 타개하려고 독가스까지 동원했다.

 

샘 멘더스(Sam Mendes) 감독은 제1차 세계대전의 지루한 참호전 양상을 '1917'(2019년)에서 실감 나게 그렸다.

내용은 다음날 일제 돌격을 앞둔 영국군 부대가 독일군의 함정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합국 사령부에서 돌격을 막기 위해 전령을 급파하는 내용이다.

 

전령으로 뽑힌 두 병사는 1,600명의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선을 가로지르는 여정에 오른다.

멘더스 감독은 참호전의 특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컨티뉴어스 쇼트라는 독특한 영상 기법을 사용했다.

 

컨티뉴어스 쇼트란 중간에 자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어지는 느낌을 주는 영상이다.

물론 스포츠 중계나 라이브 공연이 아닌 이상 두 시간짜리 드라마를 이렇게 찍을 수는 없다.

 

실제로는 커트해서 나눠 찍지만 어디서 커트했는지 모를 정도로 교묘하게 끊어서 찍고 이를 편집으로 감쪽같이 연결해 끊어지지 않는 느낌을 준다.

그만큼 촬영이 힘들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관객이 어색한 것을 금방 눈치채기 때문에 촬영에 공을 들여야 한다.

심지어 햇빛이 비추는 시간과 각도에 따라 그림자가 달라질 수 있어서 아예 해가 없는 흐린 날에만 골라서 촬영했다.

 

이렇게 공을 들인 덕분에 관객들은 초반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George MacKay)와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 Dean-Charles Chapman)가 구불구불 이어지는 긴 참호를 따라 움직이는 장면을 보며 실제 전선의 참호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참호를 벗어난 스코필드가 폐허가 된 마을과 들판을 내달리는 장면도 하나의 쇼트처럼 길게 이어지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이 작품은 서사보다 공간과 길이에 대한 영화다.

길게 이어지는 참호와 죽음의 전선을 달리는 병사들을 통해 단절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을 묘사했다.

 

그 시간은 곧 죽음을 향한 시간이기도 하고 죽음을 막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간 동안 병사들은 쉼 없이 달린다.

 

오히려 멈추는 순간 적의 표적이 돼서 죽음을 맞는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죽음을 향한 로드 무비인 셈이다.

 

더불어 샘 멘더스 감독은 폐소공포증을 일으킬 듯한 참호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의 적나라한 모습 등 세세한 디테일로 전장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그렸다.

덕분에 많은 대사를 쓰지 않고도 그 어떤 반전 메시지보다 강한 울림을 준다.

 

병사들이 달리고 구르며 쓰러지는 모습이 그 어떤 대사보다 강렬한 웅변으로 다가온다.

별 것 없는 스토리를 2시간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보게 만드는 것은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오는 영상 덕분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영상의 힘이 강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작품상을 다툴만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만큼 이야기의 구성이 뛰어나고 치밀하지 못하지만 영상으로 서사를 끌고 나가는 힘만큼은 높이 칭찬할 만하다.

국내 출시된 4K 타이틀은 4K와 일반 블루레이 등 2장의 디스크로 구성됐다.

 

2160p UHD의 2.39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4K 타이틀은 뛰어난 화질을 자랑한다.

필터링된 색감이 잘 살아 있고 윤곽선이 깔끔하다.

 

하지만 일반 블루레이보다 화질이 크게 좋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 수 있다.

블루레이 화질도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우수하다.

뒤에서 앞으로 날아가는 전투기 소리를 들어보면 방향감이 잘 살아 있고 소리의 이동성도 좋다.

 

부록으로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 제작 배경과 제작과정, 음악, 캐스팅, 미술과 예고편 등 다양한 내용이 한글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부록 영상도 HD로 제작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깊게 판 참호를 따라 병사들을 따라가는 장면의 현장감을 핸드헬드 촬영으로 잘 살렸다. 제작진은 1.6km 길이의 참호를 만들었다.
샘 멘더스 감독은 제1차 세계대전때 영국 왕립근위보병대 1대대에서 전령으로 활약한 할아버지 알프레드 멘데스 상병의 일화를 토대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제작진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거나 나무 사이를 지날 때 교모하게 컷 한뒤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원 컨티뉴어스 쇼트를 찍었다.
컨티뉴어스 쇼트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로프'를 찍을 때 고안한 방법이다. 당시 필름 롤의 길이가 10분이어서 이를 교체할 때 촬영이 끊어졌는데 인물이 시야를 가리는 교묘한 방법으로 필름 교체를 위해 커트하는 순간을 관객이 모르게 했다.
제작진은 끊어진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영국 글래스고의 고번 부두에 세트를 만들어 찍었다.
폐허가 된 에쿠스트 마을도 제작진이 벌판에 만든 세트다.
제작진은 현장감 넘치는 촬영을 위해 아리에서 제작한 초소형 디지털 카메라인 알렉사 미니 LF를 사용했다.
제작진은 워낙 야외 촬영이 많아 자연 조명에 의지했다. 촬영은 유명한 로저 디킨스가 맡았다. 그는 이 작품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촬영상, 영국 BAFTA 촬영상 등을 받았다.
이 작품은 주연보다 조연들이 더 유명하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앤드류 스콧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다.
막판 참호를 가로질러 달리는 장면은 트럭 뒤에 카메라 크레인을 얹어서 병사를 따라 달리며 찍었다. 참호는 솔즈베리 평원에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