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화려한 휴가

울프팩 2007. 7. 28. 17:41

대학에 들어가서 가장 처음 받은 충격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담은 비디오를 봤을 때였다.
주로 해외 언론들이 촬영한 사진과 뉴스를 기록한 비디오 테이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했다.
피투성이의 시체들이 나뒹구는 이미지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도저히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비디오 테이프를 본 80년대 대학생들이라면 공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당시에 중학생이었지만 그런 일이 국내에서 벌어지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뉴스나 신문에서도 언론검열때문에 제대로 보도조차 안했고 서슬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아무도 그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서 책으로, 비디오테이프로, 육성으로 접할 수 있었다.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2007년)는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남짓 광주에서 벌어진 그 날의 기억을 담고 있다.
생존자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보니 부담을 느껴서 그랬는 지 모르겠지만 정치적 배경보다는 개개인의 인물에 초점을 맞춰 휴먼 드라마로 그렸다.

그렇다보니 너무나 미니멀한 이야기가 돼버렸다.
무려 3개 공수여단과 2개 육군 사단이 투입된 대대적인 사건이었는데도 마치 1개 소대 정도의 병력이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고 광주 시민 전체의 항쟁보다는 수십명의 시민군 이야기로만 축소된 느낌이다.

너무나 큰 사건이기에 애써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지만 결과적으로 의도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민우(김상경)와 신애(이요원)라는 주인공들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개인이 아닌 역사적 사건의 대표성을 띤 인물들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면서 정치성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했다.

그리고 인물들이 너무 정형화됐다.
무조건 시민군은 정의감에 불타고 계엄군은 인면수심의 악마로만 묘사됐다.

차라리 인물 묘사는 최민수가 출연했던 드라마 '모래시계'가 훨씬 나았다.
계엄군 가운데에서도 어쩔 수 없이 동원된 사람들은 희생자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잘 그린 드라마였다.

아쉬웠던 부분은, 어렵게 포니 자동차까지 구해서 영화를 찍었는데 이왕이면 고증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당시에는 두발 자유화 이전이어서 교복과 더불어 중고생들은 모두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다.
심지어 교문에서 선도부 및 학생부 선생이 앞머리가 2센티미터를 넘으면(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서 머리를 집어본다) 영락없이 머리 위에 '바리깡'으로 고속도로가 뚫렸다.
그런데도 영화속 고교생들, 특히 이준기는 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 검은 교복에 반드시 검은 헝겊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영화처럼 검은 교복에 갖가지 운동화를 신을 수 없었다.
참 살기 힘든 시대를 재현하다보니, 고증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당시 사건들과 보도 사진들을 일부나마 재현한 영상을 보니 옛 기억이 나서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막판에 느리게 흐르던 '님을 위한 행진곡'은 학창시절 목터지게 불렀던 기억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벌써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던 부분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참으로 이 땅에 산다는 죄가 크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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