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김의성 1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블루레이)

홍상수 감독의 14번째 작품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년)을 보면 프랑스 사람들이 홍 감독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뜻밖에도 프랑스 가수 제인 버킨이 깜짝 출연한다. 배우이자 가수인 그는 프랑스 샹송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마치 소녀가 속삭이는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로 읊조리듯 부르는 유명한 노래 'Yesterday Yes a Day'를 들어보면 그의 매력에 푹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67세 할머니여서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젊은 시절에는 아주 예쁜 패션모델 같은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 역시 유명 가수인 세르주 갱스부르와 결혼해 낳은 딸 샤를르 갱스부르 또한 배우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런 버킨이 이 작품에 출연한 이유는 홍 감독의 전작인..

26년

조근현 감독의 '26년'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유족들이 모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단죄하는 내용의 영화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실제 역사와 상상을 어떻게 버무렸을 지 궁금했는데, 기대 이하로 실망스럽다. 강풀의 원작 만화를 보지 못해서 영화 내용이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 지 알 수 없지만 영화의 내용은 너무 치졸하다. 제작진의 역사 인식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주인공들의 단죄는 개인의 분노와 복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초반 5.18 항쟁 당시 개개인의 과거 사연을 만화로 처리해 현재 시점의 실사와 차별한 시도는 좋았지만 이후 이야기의 진행은 너무 답답하고 맥이 빠지게 흘러간다. 왜 그리 등장인물들의 사설은 길고 구구절절한 지 일장 연설을 듣는 것 같고, 막상 복수에 나선 행동은 마치 골..

영화 2012.11.30

남영동 1985

타인의 고통을 무덤덤하게 바라본다는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은 참 불편한 영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실제로 겪었던 고문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한마디로 고문의 일대기다. 시종일관 약 2시간 동안 처절하게 울리는 비명 속에 한 남자가 고문 당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 영화는 밑도 끝도없이 시작하자마자 고문실로 잡아들인 남자를 족치며 시작한다. 무슨 영화가 줄거리도 없이 무조건 고문으로 때울 수 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네 과거가 실제로 그랬다. 밑도 끝도 없이 멀쩡히 길가던 사람을 잡아다가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빨갱이를 만든 역사가 있다. 그러니 영화..

영화 2012.11.24

북촌방향

이 영화, 참 기이하다. 어디서나 봄직한 일상의 소소함 속에 생각할 거리를 던졌던 게 그동안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라면 그의 12번째 영화인 '북촌방향'(2011년)은 전작들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조각그림처럼 흩어진 평이한 삶의 단면들이 같은 점이라면, 뒤틀린 시공간은 다른 점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힘들다. 선배(김상중)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영화감독(유준상)이 북촌이라는 동네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부대끼는 내용은 언뜻보면 하루 동안 이야기 같으면서 며칠 사이 벌어진 일 같기도 하다. 그만큼 영화 속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보니 시간의 배열도 혼란스러워 인과관계도 분명치 않다. 즉, 귀퉁이가 닳아서 두루뭉실한 퍼즐 조각처럼 어떤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감독의 이름을 알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은 찌는듯한 한여름 날씨처럼 권태롭고 답답한 소시민의 일상을 다룬 수작이다. 유명하지 못한 소설가 효섭(김의성),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유부녀 보경(이응경), 그런 효섭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민재(조은숙), 묵묵히 민재를 짝사랑하는 민석(양민수) 등 등장인물들은 일과 사랑 어느 것 하나 쉽게 풀지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영화전문기자 오동진은 이 영화를 가리켜 1990년대 들어와 꿈을 잃어버린 1980년대에 20대였던 세대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면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꿈을 접은 1980년대 학번들을 다룬 노래다. 정태춘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