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칸영화제 20

끝까지 간다 (블루레이)

김성훈 감독의 '끝까지 간다'(2013년)는 신나는 액션게임 같은 영화다. 이 영화는 아무때나 시작해도 간단한 조작만으로 즐길 수 있는 액션게임처럼 이야기의 전후맥락을 거두절미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 집중했다. 내용은 어느날 우연히 교통사고를 낸 뒤 시체를 감춘 형사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협박 당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일이 꼬여도 너무 꼬인 주인공의 상황이 긴장감 넘치는 순간들을 만들어 내며 이를 통해 보는 사람의 아드레날린이 솟게 만든다. 그렇다보니 영화는 시종일관 이선균이 맡고 있는 형사 위주로 흘러간다. 주변 동료 형사들은 거의 곁가지 수준이며, 주인공을 압박하는 악당 조차도 캐릭터 설명이 불충분하다. 이처럼 지나치게 주인공에만 집중하면 영화가 속도감있게 흘러 갈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블루레이)

1990년대 후반, 특이한 취재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언론을 통해 처음 커밍 아웃을 하게 된 어느 여성이다. 한창 혈기방장한 20대에 어울리게 가죽 옷을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담배를 피워물던 그는 록커 느낌이 물씬 났다. 아닌게 아니라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고, 다소 약간은 겉멋처럼 동성애에 빠져든 그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서울 신촌 사거리에 있는 여성 동성애자들의 아지트 같은 카페를 방문했다.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출입을 막지는 않았지만 금남의 집이나 다름없는 그 곳에 여기저기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정장에 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소개로 하나 둘 만나보니 그곳에 남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큰 키에 청바지와 남방을 받쳐 입고,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자른 선머슴 ..

피아노 (블루레이)

제인 캠피온 감독은 작품들 속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홀로서기에 대해 일관된 메시지를 견지해 왔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 바로 '피아노'(The Piano, 1993년)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에이다(홀로 헌터)는 아주 척박한 환경에 놓인 외로운 여성이다. 그의 현실을 대변해 주듯 사방이 온통 진흙밭 투성이인 뉴질랜드에서 그는 오로지 딸과 피아노에 의지해 살아간다. 하나 뿐인 남편(샘 닐)은 온통 땅을 사서 넓히는데만 관심이 있고, 에이다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에이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오로지 딸과 수화로만 대화하는 에이다에게 유일하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통로는 피아노 뿐이다. 그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피아노는 에이다의 말이자 감정이다..

범죄의 요소

영화 '범죄의 요소'(The Element Of Crime, 1984년)는 실제 성행위를 촬영한 영화 '님포매니악'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덴마크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데뷔작이다. 신인의 작품이지만 놀라운 영상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1984년 칸영화제에서 기술상을 받으며 범상치 않은 작가의 등장을 예고했다. 내용은 복권 파는 소녀만 골라서 죽이는 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다. 형사는 오래된 스승이 쓴 '범죄의 요소'라는 논문에 따라 범인을 추적한다. 논문의 요지는 범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결국 범인의 입장이 돼서 그의 심리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풀어간다. 하지만 영화는 줄거리보다 난해한 파편같은 영상이 시선을 끈다. 루이 브뉘엘의 영화처럼 상징과 은유적 소품 및 장치로 가득찬..

시네마천국 (블루레이)

어려서 극장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가는 곳이었다. 어쩌다 아버지가 초대권을 얻어 오시면 어머니나 할머니 손을 잡고 동네 동시상영관을 찾았다. 그렇게 '로보트 태권V'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전자인간 337' '황금날개 1 2 3'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학교 친구들을 만나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했고, 그마저도 볼 수 없었던 아이들은 아무말 없이 부러운 눈빛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벌써 그것이 얼추 40년 전 일이 돼가니 빛바랠 때도 됐는데, 영상이나 아이들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그 기억이 비롯됐던 동네 동시 상영관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아벤고 공수군단'의 정윤희를 만나고 나면 잠시 후 '맹룡과강'의 이소룡을 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 곳에서 '벤허'의 찰튼 헤스톤과 '드라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