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크리스토퍼 도일 11

아비정전 (블루레이)

나른하고 후덥지근한 여름, 턴테이블에서 맘보 음악이 바람 불 듯 흘러나오고, 여기 맞춰 청년이 흐느적거리듯 춤을 춘다. 잊을 수 없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1990년)은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엇갈린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은 세기말 홍콩 반환을 앞두고 불안했던 홍콩 사람들의 심리를 투영한 작품이다. 영상이나 구성이 꽤나 공들여 잘 만든 작품인데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유는 왕가위의 데뷔작이었던 '열혈남아'에 매료된 사람들이 또다시 툭툭 끊어지는 듯한 빠른 몽타주 기법의 액션과 열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봤다가 너무나 긴 호흡의 서정적인 이야기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열혈남..

사랑해 파리

20명의 영화감독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였다. 이유는 한가지, 사랑의 도시 파리를 찬미하기 위해서다. 면면들도 쟁쟁하다. '슈팅 라이크 베컴'의 거린더 차다, '굿 윌 헌팅'의 구스 반 산트, '파고'의 코엔 형제, '화양연화'를 찍은 크리스토퍼 도일,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알폰소 쿠아론, '스크림'의 웨스 크레이븐, '사이드웨이'의 알렉산더 페인 등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한 색깔을 지닌 감독들이 모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파리 시내 20개구 가운데 한 곳을 골라서 5분 내외의 영상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옴니버스 영화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2006년)다. 개성강한 감독들이 모이다 보니 각 편의 이야기도 다양하다. 흡혈귀의 사랑부터 중년..

에로스

'에로스'(Eros, 2004년)는 왕가위, 스티븐 소더버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 3명의 감독이 각각 감독한 약 40분 분량의 단편 3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다. 이 작품은 제목이 말해주듯 사랑에 대한 세 감독의 헌사다. 워낙 개성이 강한 감독들인 만큼 작품의 색깔도 확연하게 차이난다. 왕가위 감독은 그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것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하면서도 안타까운 사랑을 다뤘고,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술자리에서 흔히 얘기하는 야한 농담처럼 성을 패러디했다. 반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은 가장 직접적으로 육욕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한다. 평소 세 감독의 스타일을 좋아했다면 한 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만큼 내용을 떠나 감독의 스타일을 이해하겠다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화양연화

왕가위(王家卫) 감독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열혈남아'와 '화양연화'다. '열혈남아'가 그의 패기를 느낄 수 있는 독보적 작품이라면 '화양연화'는 명품처럼 빛나는 걸작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 2000년)는 극장 개봉 당시 지루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영화는 상당히 느리다. 1시간 30분이라는 길지 않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여러 장면이 슬로 모션과 정지 화면에 가까운 클로즈업으로 흘러간다. 왕 감독은 이처럼 느린 영상을 통해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 미국의 명가 크라이테리언 DVD를 리핑한 게 아닐까 싶은 국내 출시판은 화질 좋은 프로젝터로 보면 아련한 색감과 곱디고운 필름 입자가 그대로 느껴져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살린다. 여기에 시게루 우메바..

쓰리 몬스터

'쓰리몬스터'(Three, Monster, Three...Extremes, 2004년)는 3개국 감독이 각각 40분짜리 공포물 3편을 제작해 모아놓은 옴니버스 영화다. 우리나라에서 박찬욱, 일본의 미이케 다카시(三池崇史), 홍콩의 프루트 챈(陳果) 감독이 참여했다. 세 작품 가운데 가장 좋은 작품은 프루트 챈이 만든 '만두'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내용이지만 미를 추구하는 여심을 깔끔하고 단정한 영상으로 풀어냈다. 메시지 전달이 분명하고 내러티브 전개도 꼬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기대를 모은 박찬욱 감독의 '컷'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들을 조여드는 긴장감은 괜찮았으나 범행 동기와 사건 해결 등이 다소 억지스럽다. 미이케 다카시의 '상자'는 비극적인 두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 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