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홍콩 40

화양연화 (블루레이)

왕가위 감독의 걸작 '화양연화'(2000년)는 엇갈린 인연과 사랑에 대한 영화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연기한 남과 여는 묘하게도 얽힌 인연 때문에 바람을 피는 불륜의 관계이지만, 그들은 끝까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고집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이상의 진전을 원치 않고 서로의 사랑을 가슴에 묻는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시간이 흘러 서로가 돌아보았을 때 그들의 가슴에 남는 것은 안타까운 그리움과 회한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나간 사랑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를 의미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로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낯선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으로 발전했다가 남남이 된 후 서로가 그리워 하는 감정의 변화를 농..

열혈남아 (블루레이)

어떤 판본을 먼저 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980년대 후반 대학 시절에 처음 본 왕가위 감독의 걸작 '열혈남아'(1987년, http://wolfpack.tistory.com/entry/열혈남아-골든-콜렉션)는 왕걸과 엽환의 노래 '汝是我胸口永遠的通'(너를 보낸 내 가슴은 아프고)로 기억한다. 유덕화가 장만옥의 팔을 낚아 채 공중전화 박스로 뛰어든 뒤, 하얗게 부서지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열렬하게 키스를 나눌 때 흘러 나오던 이 노래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왕걸의 CD를 듣다가 이 노래가 흘러 나오면 가슴이 뛰며 아련함이 밀려 온다. 그만큼 왕걸과 엽환의 노래는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의 장면들과 기막히게 어울렸다. 따라서 두 사람의 노래가 없는 '열혈남아'는 상상할 수도 없고, 극단..

감시자들 (블루레이)

조의석, 김병서 감독이 공동연출한 '감시자들'(2013년)은 철저한 허구를 바탕으로 한다. 홍콩의 유내해 감독이 만든 '천공의 눈'을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무대를 홍콩에서 서울로 옮겼다. 촘촘히 깔린 폐쇄회로(CC)TV를 통해 서울시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며 기억력이 좋은 경찰들이 일반 시민으로 위장해 범죄 용의자들을 하루 종일 미행하는 경찰 특수조직의 이야기를 다뤘다. 마치 우주관제센터 같은 감시반 풍경이 보기에는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는 모두 가짜다. 경찰에는 실제 이런 조직이 없다. 더러 경찰청 본청 산하의 범죄정보과를 유사조직으로 언급하지만 역할과 기능이 영화와 전혀 다르다. 조현오 전 청장이 2011년 신설한 범죄정보과는 굵직한 정치, 경제계 정보를 내사해 범죄 사실이 발견되면 관련 수사팀에..

도둑들 (블루레이)

'범죄의 재구성' '타짜' 등 최동훈 감독의 영화들은 특징이 있다. 숨 쉴 틈 없이 속도감있게 몰아치는 이야기 전개와 여기에 장단을 맞추는 대사, 그리고 여러 명의 배우들이 떼를 지어 출연하는 스타 캐스팅이다. '도둑들'(2012년)도 예외가 아니다. 홍콩 마카오 부산을 오가며 10명의 도둑들이 300억원대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내용이다. 전지현 김혜수 이정재 김윤석 등 최고의 스타들이 씹던 껌, 펩시, 예니콜 등 재기발랄한 별명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퍼즐같은 대사를 속사포처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마치 김수현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불과 서너 작품 만에 이런 스타일을 만들었으니 최 감독은 좋게 보면 자기 주관이 분명한 것이고, 나쁘게 보면 벌써 자신의 틀에 얽매이는 것은 아닌 지 우려된다. 소위 방송..

도둑들

방송가 은어 중에 '쪼(조)가 생긴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 방송을 하다 보면 그 사람만의 어투나 동작 등 특징이 굳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좋게 표현해 스타일화 하는 것이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보면 그만의 '쪼'가 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에 이어 이번 '도둑들'(2012년)까지 그가 연출한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그만의 특징이 보인다. 마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처럼 여러 명의 스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정신없이 돌아친다. 대사도 김수현 드라마처럼 관객이 미처 생각할 틈 없이 아귀가 딱딱 맞는 얘기를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특히 주인공들의 팀웍은 강한 자를 몰아치는데 집중되며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적당한 반전도 연출한다. 히치콕이나 알트만 스타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선 작품들이 흥행하면서 최 ..

영화 2012.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