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흑백영화 14

지슬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오멸 감독의 '지슬'(2013년)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영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것도 현란한 색들이 난무하고 입체영상이 스크린을 뚫는 시대에 아득한 시절 세상을 주름잡은 공룡같은 흑백 영상으로 승부를 걸었다. 오 감독이 제주 4.3 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흑백 영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흰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가지를 뻗친 나무와 오롯이 흰 눈을 이고 선 집들을 보면 여백의 미를 살린 동양화 같다. 여백의 미는 생각을 정리할 틈을 준다. 시퀀스가 끝날 때마다 하얗게 또는 온통 검게 변하는 화면은 보는 이의 감정으로 서서히 차오른다. 특히 온통 어둠 뿐인 지하 동굴에 숨은 사람들이 부유하듯 화면을 떠다니며 두런 두런..

영화 2013.04.07

파리의 여인

찰리 채플린이 각본, 연출에 작곡까지 한 '파리의 여인'(A Woman of Paris, 1923년)에는 채플린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딱 한 컷 지나가지만 아무도 채플린인 줄 모른다. 채플린은 기차역의 짐꾼으로 카메오처럼 나오는데, 그것도 고개를 숙이고 짐을 들고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봐도 알아보기 힘들다. 특이한 것은 이 작품이 코미디가 아니라 정통 멜로 드라마라는 점. 영화는 사랑했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엇갈리게 되는 연인들의 슬픈 이야기를 다뤘다. 채플린이 이 작품을 만든 이유는 비평가들 때문이다. 몇 몇 비평가들이 무성영화는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자, 채플린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그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소품 ..

당나귀 발타자르

동물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많지만 당나귀가 주인공인 영화는 드물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작품 '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 1966년)는 당나귀의 일생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발타자르가 새끼 당나귀 시절부터 여러 주인의 손을 거쳐 죽음을 맞을 때 까지 당나위의 삶을 묵묵히 담아 냈다. 울음이나 특별한 행동없이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당나귀는 인간의 본성을 반추하는 거울이다. 영화 속 당나귀의 삶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어린 시절에는 아이들의 사랑을 받지만 자라서는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채찍 세례를 받으며, 급기야 꼬리에 불이 붙기까지 한다. 여기에 당나귀의 삶은 능동적이지도 못하다. 즉,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지 못하고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변하는 수동..

장군

버스터 키튼은 찰리 채플린과 더불어 1920년대 무성 영화 시대를 이끈 위대한 영화인이다. 찰리 채플린이 콧수염과 중절모, 빙빙 돌리는 지팡이로 대표되는 가난뱅이 떠돌이 캐릭터를 구축했다면, 버스터 키튼은 마치 가면을 쓴 것 처럼 시종일관 무표정이 특징이다. 그래서 버스터 키튼의 별명은 great stone face, 즉 위대한 무표정이었다. 보드빌 배우였던 부모를 따라 다니며 3세때부터 무대에 섰던 그는 아버지가 객석을 향해 휙휙 집어던지면 나가 떨어졌다가도 아무 일 없는 것 처럼 툭툭 털고 일어나는 연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곡예를 연마하며 힘과 기술을 익혀 자신의 영화를 찍을 때 스턴트 연기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키튼 영화의 특징이라면 아크로배틱 같은 곡예와 더불어 웃음과 긴장..

비브르 사 비

프랑스의 누벨바그 감독인 장 뤽 고다르는 "필름은 제 2의 존재들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즉, 카메라가 담은 존재들로 필름을 채운다는 점에서 카메라는 곧 기록장치이자 관객이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고다르가 감독 및 각본을 쓰고 편집과 내레이션까지 맡은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 1962년)이다. 이 작품은 오락성으로 흥행만 쫓는 대중영화들이 넘쳐나는 요즘 진정한 영화보기란 무엇인 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제목인 '비브르 사 비'는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주체적 삶을 의미하지만, 이면에는 다른 뜻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매춘을 '삶'(Vie)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곧 매춘부의 삶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주인공 나나는 유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