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흑백영화 14

어느 멋진 일요일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초창기 작품 '멋진 일요일'(1947년)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다. 어느 가난한 연인의 일요일 한때 데이트를 다룬 이 작품을 보면 두 사람의 로맨스보다 뒷배경에 눈이 간다. 무너진 건물 투성이인 폐허, 꼬질꼬질한 거지소년,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과 암표상 등 요즘 도쿄와 비교하면 천양지차의 풍경이다. 실제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비참했다. 한도 가즈토시가 쓴 책 를 보면 당시 모습이 생생히 기록돼 있는데, 도쿄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전쟁 때 폭격으로 생산시설이 모두 파괴되는 바람에 미 군정은 식량통제법을 만들어 1949년까지 배급을 실시했다. 그러나 1인당 하루 300g의 배급량은 턱없이 부족해 당시 ..

파업

예전 대학 시절 학교에서 '파업 전야'라는 16미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장산곶매라는 영화집단이 만든 작품이었는데,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공장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학교에서 본 이유는 당시 정권에서 극장 상영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가를 돌며 상영을 했고, 경찰은 이를 막으려고 최루탄을 뿌리며 생난리를 떨었다. 당시 극장에서 봤던 상업영화들과 달라 꽤 충격적이었는데, 영화를 함께 지켜 본 주연배우 홍석연에게 싸인까지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작품에서 받은 인상이 하도 강렬해서 싸인을 해준 홍석연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는 이후에 영화 '친구' '넘버3' '도가니' 등 여러 편의 상업영화에 단역으로 나왔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무성영화 '파업'(Stach..

우게츠 이야기

세계에 일본 영화를 알린 세 사람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를 꼽는다. 이중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일본 회화적 전통미를 잘 살린 감독으로 꼽힌다. 주로 억압된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그만의 유려한 카메라 테크닉으로 동양적 미를 잘 살렸다는게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이를 제대로 보여주는 대표작이 바로 '우게츠 이야기'(1953년)다. 우에다 아키나리의 기담집에 실린 3편의 이야기를 묶은 이 작품은 일본 전국시대 도예공이 귀신과 놀아나는, 한마디로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른다는 우리네 속담같은 얘기다. 얼핏보면 별 것도 아닌 귀신영화일 수 있지만 서양인들은 이 작품에 홀딱 반했다. 앙드레 바쟁은 "리얼리즘의 극치"라고 평했고, 장 뤽 고다르는 이 작품 이후 미조구치..

동경이야기

참으로 가슴이 먹먹한 영화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이야기'(1953년)는 노부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잔잔한 이야기로 큰 울림을 준다. 미국의 유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위대한 감독일 뿐 아니라 위대한 선생님"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을 보면 그 말에 절로 공감이 간다. 10년 마다 세계 명작 순위를 메겨 유명한 영국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 사운드'는 올해 발표한 리스트에서 1위 히치콕의 '현기증' , 2위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에 이어 3위로 '동경이야기'를 꼽았다. 이처럼 앞다퉈 이 작품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 놓는 까닭은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자식들을 모두 분가시킨 노부부가 자식들을 찾아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