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화 감독의 '잉투기'(2013)는 참으로 재기발랄한 작품이다.
제목인 잉투기는 현재진행형인 ing와 격투기가 결합된 단어로, 우리는 지금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디씨인사이드의 격투기 갤러리에서 실제로 열렸던 네티즌들의 격투기 대회에서 따온 제목으로, 여기에는 잉여로 통하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격투기 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즉, 보이지 않는 인터넷에서 치사하게 댓글로 싸우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현실세계에서 운동으로 맞붙어보라는 의미다.
내용은 모 커뮤니티의 격투기 갤러리에서 댓글로 다투게 된 칡콩팥(엄태구)과 젖존슨이 실제로 만나 싸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만큼 영화는 요즘 세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특히 잉투기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현피와 먹방, 왕따 등 각종 사회현상과 문제들이 관심을 끄는 소재로 등장한다.
현피는 말 그대로 현실과 플레이어 킬(PK)을 합친 신조어로, 인터넷에서 아이디로 존재하는 상대와 직접 현실공간에서 만나 싸운다는 뜻이며, 먹방은 음식을 먹으며 진행하는 인터넷 개인방송을 말한다.
소재와 내용도 재미있지만 작품을 빛낸 것은 신선한 배우들의 열연이다.
복수의 일념에 불타는 키보드 전사 칡콩팥 역의 엄태구는 한심하고 못난 청춘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날카로운 눈매와 어눌한 말투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는 요즘 드라마 '감격시대'에도 나온다.
특히 감독인 엄태화와 형제 간이어서 마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감독과 배우로 데뷔한 류승완 류승범 형제를 보는 것 같다.
격투기 소녀 영자를 연기한 류혜영도 개성강한 마스크와 연기로 눈길을 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먹방에 몰입하는 소외된 여고생 역할을 자연스럽게 잘 소화했다.
앞으로 눈여겨 볼 만 한 배우다.
이들이 자연스런 연기로 보여주는 요즘 세대들의 진솔한 모습이 재미와 더불어 여러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특히 "싸우는 너희들은 진지하지만 이를 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재밋거리일 뿐"이라는 영자의 대사는 사이버 공간에서 별 것도 아닌 일에 죽자 살자 매달리는 소모적 현상들의 허무함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작품을 가리켜 "국산 '파이트클럽', 21세기의 '택시드라이버'"라고 극찬을 했는데, 그만큼 구성과 연출,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윤곽선에 살짝 계단현상이 나타나는 등 블루레이에 익숙한 눈에는 성에 차지 않지만, DVD로는 볼 만한 화질이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한다.
부록으로 감독과 배우들의 음성해설, 짧은 캐릭터 소개 영상과 감독의 짧은 인터뷰, NG 컷과 뮤직비디오, 엄 감독의 단편 '숲'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하며, MOT의 노래 '날개'를 엔딩 크레딧에 사용한 단편 '숲'도 볼 만 하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PC에서 play 표시가 있는 사진은 play 버튼을 누르면 관련 동영상이 나옵니다.*
초반에 나오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는 문구처럼 영화는 디씨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흔히 일어나는 실화들을 소재로 사용했다. 엄태구는 초반 싸움 장면을 찍다가 땅에 머리를 부딪쳤다.
실제 잉투기 장면을 촬영한 영상을 영화에 그대로 사용했다.
격투기 체육관 장면은 군포체육관에서 촬영.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인 엄태구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취업이 보장된 공군기술고로 진학했다가 잘 맞지 않아 중퇴한 뒤 친구의 권유로 배우가 됐다. 7년간 단역, 조역을 거친 그는 검정고시를 치러 건대 영화과에 진학했으며 영화 '인간중독'에도 출연했다.
두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 때문에 은근히 로맨스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막판 "그저 재미있어서 부추겼을 뿐"이라는 냉정한 대사로 여지없이 달콤한 상상을 깨뜨린다.
건대 영화과에서 연기를 전공한 류혜영은 이 작품을 위해 따로 격투기를 연습했다. 극 중 영자 특유의 '~뭐임'이라는 대사는 평소 류혜영의 말투를 살렸다.
영화에 등장하는 숱한 댓글 중에는 실제로 디씨인사이드에서 퍼 온 댓글도 있다. 뿐만 아니라 리니지의 바츠해방전쟁 등 사이버 공간의 실제 에피소드들도 등장한다.
모니터 뒤에 숨은 키보드 워리어, 먹방을 진행하는 외톨이 소녀 등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외로운 존재들이다. 결국 그들의 외로움이 사회를 향한 무지향성 폭력으로 폭발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홍대 광고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엄태화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거쳐 이 작품으로 장편 데뷔했다. DVD에 실린 단편 '숲'으로 2012년 미장센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해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간석오거리는 실제 현피 장소로 자주 거론된 곳. 이곳에서 촬영중인 거리 싸움 장면을 보고 시민들이 실제 싸움으로 오해해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들이 출동하기도 했단다.
영화의 주제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된 장면이 바로 거리 싸움장면이다. 스티로폼을 머리로 들이받아 부수고, 솔잎을 뜯어서 표창처럼 던지자 달려들던 사람들이 얼떨결에 쓰러지는 슬로 모션 장면들은 진지한 분위기인데도 불구하고 절로 웃음이 터진다.
엄 감독은 2000년대 중반부터 디씨인사이드, 웃긴대학 등을 드나들며 잉투기 등 여러 소재들을 접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살려 이 영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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