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은 댄 브라운의 소설 '인페르노'에서 중요한 장소로 나온다.
론 하워드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는 랭던 교수를 연기한 톰 행크스가 시에나 역의 펠리시티 존스와 함께 추적자들을 피해 이 곳에 숨어든다.
여기서 한바탕 활극을 펼친 다음 그는 사라진 단테의 마스크를 추적한다.
그만큼 소설과 영화에서 베키오 궁전은 모든 사건이 확대되는 장소다.
[시뇨리아 광장에 나란히 선 베키오 궁전과 란치의 회랑. 그 사이에 우피치 미술관이 보인다. 베키오 궁전도 1966년 대홍수때 4미터 높이까지 물에 잠겼다.]
이탈리아어로 오래됐다는 뜻의 베키오 궁전은 피렌체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어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1229년에 건축됐다.
이후 피렌체 대성당과 산타크로체 성당 건립에 참여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1298년 증축에 참여해 1314년 완성했다.
나중에 실세가 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통치하며 이 곳을 10년간 궁전으로 삼았다가 1550년 코시모 1세가 아르노강 너머에 피티궁을 짓고 이사하면서 피티궁은 새로운 궁전 즉 누오보, 베키오 궁전은 오래됐다는 뜻의 고궁으로 불리게 됐다.
[피렌체를 통치한 코시모 1세 대공의 청동기마상. 잠볼로냐가 만들었다.]
94미터 높이의 종탑이 우뚝 솟은 이 고딕 양식의 건물은 원래 로마제국 시대 요새였다.
특히 14세기를 거치면서 주변 도시인 시에나가 밀라노와 손잡고 끊임없이 침공해 요새 기능이 강화됐고 벽에 총을 쏘기 위한 총안과 감시탑 등이 설치됐다.
옛 전통 때문에 지금도 피렌체 시청으로 쓰이는 이 곳은 단순히 역사적 기념물이 아니라 안에 대단한 예술품들을 채워놓은 박물관이다.
특히 영화와 소설 '인페르노'를 재미있게 봤다면 기억에 남을 만한 피렌체의 명소다.
[베키오 궁전 옆에 있는 암만나티 작품인 '넵튠의 분수'. 하필 공사중이었다. 이 분수 옆 바닥에 둥근 동판이 하나 박혀 있는데 사보나롤라를 화형시킨 장소를 가리킨다. 사보나롤라는 예술작품들이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보고 모두 태워버리라며 극단적인 신정정치를 펼쳤는데 나중에 이단으로 몰려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2'에도 사보나롤라의 화형 장면이 나온다.]
우선 궁전 정문에 거대한 조각상이 여러 점 버티고 있다.
정문을 마주 봤을 때 왼편에 서 있는 유명한 다비드상은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진품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고 여기 서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나란히 문 오른편에 서 있는 '카쿠스를 때려눕힌 헤라클레스'는 반디넬리의 작품이다.
[베키오 궁 입구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반디넬리의 '카쿠스를 때려눕힌 헤라클레스' 조각상이 나란히 서 있다.]
또 다비드상 왼편에는 도나텔로가 만든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든 유딧의 동상, 그 옆으로 암만나티가 만든 해신 넵튠의 분수, 또 그 옆으로 잠볼로냐가 만든 코시모 1세 대공의 청동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언뜻보면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쭈욱 늘어 세워놓은 것 같지만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정치적 메시지가 숨어 있다.
피렌체를 오래 통치한 메디치 가문은 무능한 피에로 2세 때문에 쫓겨난다.
군주를 쫓아낸 메디치 반대 세력들은 여럿이 공동 통치하는 공화정을 수립한다.
[홀레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든 유딧의 동상. 도나텔로가 만들었다.]
이때 등장한 야심찬 정치가가 바로 마키아벨리다.
그는 과거 로마의 공화정을 이상적인 통치형태로 보고 피렌체를 로마처럼 강력한 도시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우선 베키오 궁전이 위치한 시뇨리아 광장을 로마의 통치기구가 모여 있던 카피톨리노 언덕처럼 만들고 싶어서 원래 궁전 정문에 있던 도나텔로의 유딧을 궁 내부로 옮기고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해 만든 다비드상을 세웠다.
한 손에 돌을 쥐고 적을 노려보는 다비드상은 오랜 세월 강력한 통치자였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을 상징한다.
[베키오 궁 내부의 유명한 '500인의 방'. 천장과 양쪽 벽을 그림이 가득 메우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궁 내부로 옮긴 유딧은 메디치 가문의 강력한 통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적장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이 동상은 그만큼 함부로 도전하지 말라는 메디치 가문의 경고가 들어 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메디치의 통치를 상징하는 유딧 대신 공화정을 상징하는 다비드를 전면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가 레오 10세 교황이 되면서 다시 뒤집어졌다.
[500인의 방에서 볼 수 있는 바사리가 그린 마르시아노 전투. 그림 중앙 윗부분에 보면 오른쪽으로 살짝 누운 2개의 초록색 깃발 안에 케르카 트로바라고 적혀 있다.]
추기경이었던 조반니는 메디치 가문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워 '위대한 로렌초'로 불리던 현자 로렌초의 둘째 아들이다.
교황청의 외교를 담당했던 그는 외부 군대를 이끌고 쫓겨난 가문의 부활을 위해 피렌체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풀려난 뒤 교황에 즉위했는데 바로 훗날 면죄부를 팔아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촉발한 레오 10세다.
하지만 피렌체 시민들은 피렌체 출신의 교황 즉위에 기뻐하며 쫓아낸 메디치 가문을 다시 반겼다.
[바사리가 500인의 방 천장에 그린 '코시모 1세의 아포테오시스.' '인페르노'에서는 랭던 교수를 쫓던 추적자가 마치 코시모 1세 대공을 천지창조하는 신처럼 그린 이 그림을 뚫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렇게 권력을 다시 잡은 메디치 가문은 다비드상 대신 바치오 반디넬리에게 의뢰해 궁전 옆에 새로운 조각상을 세웠다.
그것이 헤라클레스상이었다.
한 손에 몽둥이를 쥔 채 넘어진 카쿠스의 머리를 움켜쥔 헤라클레스의 모습은 복귀한 메디치 가문을 상징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카쿠스는 소떼를 훔친 괴물로, 헤라클레스에게 덤볐다가 곤봉에 맞아 죽었다.
[베키오 궁전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었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만든 청동상 '푸토와 돌고래'.]
'함부로 까불었다가는 이 꼴난다'는 무언의 암시가 들어있는 이 조각상은 메디치 가문=헤라클레스, 카쿠스=공화주의자, 곧 메디치 가문의 반대세력이라는 함의가 들어 있다.
조각상 하단에는 '평화를 가져온 가문 메디치'라는 문구를 새겨 놓았다.
피렌체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강력하게 보여주는 신호다.
더불어 메디치 가문은 궁 내부에 서 있던 유딧 동상도 다시 바깥으로 내왔고, 새로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든 페르세우스의 무시무시한 청동상도 벤베누토 첼리니에게 의뢰해 만들어 베키오 궁전 바로 옆 란치의 회랑에 세웠다.
언뜻보면 여러 조각들을 무질서하게 늘어 놓은 것 같지만 이 속에는 이처럼 엄청난 정치적 함의와 통치세력의 강력한 권력욕이 배어 있다.
이런 의미들을 알고 조각들을 보면 다시 보인다.
[베키오 궁전의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500인의 방의 위용.]
조각들을 지나 티켓을 끊어 궁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유명한 500인의 방, 즉 살라 데이 친퀘첸토의 규모에 깜짝 놀라게 된다.
높다란 천장은 퍼즐처럼 화려한 그림들이 금박을 두른 액자와 함께 빼곡하게 들어찼고, 양쪽 벽에는 메디치 가문의 전투장면을 다룬 거대한 크기의 벽화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말 그대로 공화정 시기 정책을 논의하던 500인 위원회의 회의 장소로 쓰인 곳이어서 방의 크기와 높이 등이 거대하다.
영화와 소설 '인페르노'에서는 랭던 교수를 쫓던 추적자가 천장의 그림을 뚫고 추락하는 장소다.
[베키오 궁전에 전시된 단테의 데드마스크. 이 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않아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랭던 교수가 바사리의 벽화 '마르시아노 전투'에서 '케르카 트로바'라는 글자를 찾아내는데, 랭던 교수 흉내를 내며 그림을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무려 3층 건물 높이의 폭 17미터짜리 그림 속에서 그 글자를 찾아내기란 정말 힘들다.
문제의 글자는 그림 중앙에서 윗부분에 보면 병사들 머리 위로 초록색 깃발 두 개가 약간 포개져 있는데 거기에 적혀 있다.
망원경이라도 가져가서 훑지 않는 한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 자세에서는 찾아내기 어렵다.
궁전 내부에서는 가장 유명한 것이 바사리의 그림이지만 그 밖에도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 더 있다.
[베키오 궁 내부의 호화로운 방들. 많은 방들이 미술품으로 치장돼 방 하나 하나가 마치 갤러리 같다.]
2층 발코니에 서면 500인의 방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이 곳을 가로질러 가면 유명한 지도의 방이 나온다.
코시모 1세 대공의 휴대폼을 보관하던 이 방은 수 많은 벽장과 캐비닛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거기에 16세기 전세계 지도를 지역별로 붙여 놓았다.
총 53점의 지도는 모두 가죽 위에 손으로 그려 만들었다.
소설 속에서는 랭던 교수가 이 중 아르메니아 지도가 붙은 캐비닛을 열고 비밀의 문 속으로 달아난다.
[베키오 궁 안에 있는 지도의 방. 한 가운데 거대한 회전 지구본이 있다.]
지도의 방에는 16세기에 만든 거대한 지구본도 있다.
마파 문디(Mappa Mundi)라고 부르는 1.8미터 높이의 이 지구본은 당시 세계 최대의 회전 지구본이었다.
'인페르노'에서 랭던 교수가 베키오 궁전에 간 이유는 어떤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피렌체가 낳은 이탈리아의 대문호 단테의 데드마스크이다.
죽은 단테의 얼굴을 사진 찍듯 석고로 뜬 데드마스크가 베키오 궁전 복도 한 쪽에 전시돼 있다.
유리로 만든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데, '인페르노'에서는 이를 도난 당한다.
[지도의 방에 걸린 지도들은 16세기 장인들이 가죽 위에 손으로 그렸다. 문에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 위에 보면 한국과 일본을 그린 지도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동해가 아닌 일본해로 표기돼 있다.]
단테의 데드마스크를 보면 주요한 전시품은 대부분 본 셈인데, 위로 올라가면 베키오 궁전의 종탑에 오를 수 있다.
종탑에 오르는 비용은 따로 받는다.
종탑에서는 시뇨리아 광장을 비롯해 피렌체 시가 곳곳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 두오모와 조토의 종탑을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베키오 궁전에서 내려다 본 시뇨리아 광장. 왼편에 란치의 회랑이 살짝 보인다.]
참고로 1540년 피렌체를 통치하던 코시모 데 메디치 1세는 바사리를 시켜 베키오 궁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숱한 비밀 통로와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
이를 관람객들에게 공개하지는 않는데 8,000여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실물 크기의 사람 해골 등 진귀한 예술품들이 잔뜩 쌓여 있다고 한다.
[베키오 궁전의 종탑에서 바라본 두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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