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특이한 취재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언론을 통해 처음 커밍 아웃을 하게 된 어느 여성이다.
한창 혈기방장한 20대에 어울리게 가죽 옷을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담배를 피워물던 그는 록커 느낌이 물씬 났다.
아닌게 아니라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고, 다소 약간은 겉멋처럼 동성애에 빠져든 그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서울 신촌 사거리에 있는 여성 동성애자들의 아지트 같은 카페를 방문했다.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출입을 막지는 않았지만 금남의 집이나 다름없는 그 곳에 여기저기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정장에 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소개로 하나 둘 만나보니 그곳에 남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큰 키에 청바지와 남방을 받쳐 입고,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자른 선머슴 같은 주인장도 여자였다.
그때 느꼈던 낯선 놀라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취재가 인연이 돼서 그 후로도 연락이 닿았던 그 친구는 몇 해전 청첩장을 보내 왔다.
상대는 뜻밖에도 연하의 남성이었다.
청첩장을 받아들고 참으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동성애란 복잡 야릇하며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La vie d'Adele, 2013년)를 통해 그 어렵고 혼란스러운 동성애를 담백하고 가슴아프게 그렸다.
줄리 마로의 만화 '파란색은 따뜻하다'를 토대로 만든 이 작품은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과 이별을 다뤘다.
하지만 작품 속엔 굳이 동성애, 이성애 구분없이 사랑과 이별에 가슴 뛰고 아파하는 두 연인이 있을 뿐이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그들이 불꽃튀듯 사랑을 느껴 가까워지고, 뜻하지 않은 사건에 서로 멀어지는 과정을 어찌나 자연스럽게 그렸는 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그만큼 화장기 하나 없이 맨 얼굴로 나선 배우들의 연기가 실제 연인들을 보는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다.
원작자인 줄리 마로는 이성애자의 눈으로 그린 레즈비언의 사랑이라며 성애 장면을 문제 삼았지만, 적나라한 노출을 마다 않고 열연을 펼친 문제의 장면 또한 남다른 미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쉼없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때로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때로는 클로즈업으로 바짝 다가서며 감정의 고양을 그대로 잡아낸 케시시 감독의 연출력도 놀랍다.
여기에 영상과 잘 어울리는 삽입곡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는 감독의 꼼꼼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수작이다.
이를 반영하듯 2013년 열린 제 66회 칸영화제는 영화제 사상 처음으로 감독과 두 배우 등 세 사람에게 공동으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여했다.
1080p 풀HD의 2.35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선예도도 좋고 색감 또한 발색이 곱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항은 나뭇잎을 흔드는 미세한 바람소리를 잡아내는 섬세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부록으로 감독과 배우 인터뷰, 삭제장면 등이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play 표시가 있는 사진은 PC에서 play 버튼을 누르면 관련 동영상이 나옵니다.*
케시시 감독은 줄리 마로의 원작 만화를 보고 영화화를 결심했다.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이 영화는 삽입곡들도 훌륭하다. 특히 시위장면에 나온 HK & Les saltimbanks의 'On Lache Rien'이 압권.
머리를 파랗게 염색한 레아 세이두는 촬영 당시 26세, 주인공 아델을 연기한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는 18세였다. 감독은 주인공 이름을 캐릭터와 동화되도록 주연배우 이름으로 바꿔서 명명했다. 감독은 레아 세이두에게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 작품들을 보고 그들의 연기특징을 연구하라고 요구했다.
촬영은 소피앙 엘 파니가 맡았다. 감독은 영화 속 성애 장면들을 고전 회화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에도 등장하는 레아 세이두는 칸영화제 수상 뒤 매체 인터뷰에서 "감독의 독선 때문에 촬영이 끔찍했다"며 "다시는 작업하지 않겠다"고 케시시 감독을 비난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사이가 멀어졌다.
잡음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스탭들은 "감독이 하루 16시간씩 일하게 했고, 주말에도 일해야 했다"고 문제 삼았다. 이를 프랑스 영화제작인 노조에서는 영화 스탭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화제로 삼는 바람에 문제가 생각보다 더 불거졌다.
원작만화를 그린 줄리 마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성애자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 본 레즈비언의 정사 장면"이라며 관음증적인 대상으로만 묘사했다고 비난했다.
감독은 주연배우인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를 처음 만나자마자 빠져들어 바로 캐스팅했다. 두 여배우들은 10일간 정사 장면을 찍어 몹시 힘들어했다.
이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2013년 5월26일, 파리 앵발라드 광장에서는 동성결혼 허용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다. 그해 4월, 프랑스 의회는 동성결혼법을 통과시켜 유럽에서 9번째, 전세계에서 14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당시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정치적 의도없는 선정"이라고 밝혔지만 현지 언론들은 이 작품의 수상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봤다.
주연 여배우들은 거의 민낯으로 출연하는데 감독이 분장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촬영장에 메이크업 및 헤어아티스트도 없었다. 그래서 연기가 더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먹는 장면이 참 많이 나온다. 이 때문에 감독은 배우들에게 하루 2끼만 먹으라고 요구한 뒤 실제로 배우들이 배고파 열심히 먹는 장면을 촬영했다. 그릇이 부딪쳐 소음이 나지 않도록 식기에는 플라스틱 재질의 테두리를 만들어 덧씌웠다.
튀지니 출신인 케시시 감독은 6세때 프랑스 니스로 이주했다. 막노동꾼 아버지 밑에서 힘들게 자란 감독은 10대때부터 배우로 활동해 주목을 받았다. 1982년 출연한 '베즈네스'라는 영화에 함께 나온 여배우 갈리아 라쿠루아와 결혼했다. 갈리아는 이 작품의 각본을 감독과 공동 각색했고, 편집도 맡았다.
감독은 원작 만화의 비극적 결말 대신 아델의 앞날을 관객이 선택하도록 열린 결론으로 고쳤다. 감독은 여배우들이 대본을 한 번만 읽도록 한 뒤 촬영 현장에서 대사를 잊고 상황에 맞는 자연스런 연기를 하도록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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