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인터뷰

내가 만난 봉준호

울프팩 2020. 2. 12. 00:09

개인적인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지 않으려 하는데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은 역사적인 일이기에 그 감격과 감동을 간직하고자 옛 기억을 더듬어 봤다.

오래전 영화담당 기자 시절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래 봐야 워낙 오래전 일이고 그 뒤로 이어진 인연이 아니어서 딱히 봉 감독을 안다고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소중했던 기억이고 그 만남이 워낙 즐거웠으며 그때도 작은 감동을 받았었기에 보관하는 취재수첩 더미를 다시 뒤적여 봤다.

 

2003년, DVD 마니아 봉준호를 만나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310210018607487)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3년 10월 13일.

신문사 근처 '한마당'이라는 카페에서 봉 감독과 인터뷰 약속을 했다.

 

당시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이 종영되고 나서 두 번째 작품인 '괴물'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때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니 봉 감독은 영화담당 기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영화 개봉 전도 아니고, 한참 상영 중인 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신청한 이유는 '살인의 추억' DVD 출시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DVD 타이틀을 블루레이 타이틀로 교체했다. 프린트 필름 일부는 DVD 타이틀에 들어있던 것이다.

 

DVD 마니아 입장에서 워낙 좋게 본 영화가 DVD로 나온다니 반가워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난 봉 감독은 DVD 때문에 인터뷰를 하자는 기자는 처음이어서 재미있기도 하고 황당하고 궁금해서 나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신문에서 DVD에 관심 갖는 기자가 없었다.

과연 DVD를 가지고 제대로 인터뷰가 될까 싶었는데 웬걸, 예정했던 1시간을 훌쩍 넘겨 늦가을 햇살이 저물 무렵까지 장시간 이어졌다.

 

인터뷰라기보다 DVD 애호가들의 만남 같은 자리였다.

질문도 많이 했지만 봉 감독은 특유의 성실한 자세와 달변으로 아주 자세히 답변을 해주고, 거꾸로 특정 장면들을 어떻게 봤는지 나한테 되묻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받았던 인상은 '거구의 투박해 보이는 사내가 의외로 굉장히 섬세하다'는 점이었다.

듣기 좋은 저음으로 전하는 그의 말은 조리 있게 정리돼 있어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으면서 아주 정교했다.

 

혹시 인터뷰 연습을 따로 하나 싶을 만큼 달변이었다.

두툼하게 기록한 그날의 인터뷰 내용 중에 몇 가지를 옮겨 본다.

 

 

봉 감독은 DVD 마니아답게 '살인의 추억' DVD를 영화 촬영 전부터 어떻게 구성할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공들여 DVD 타이틀을 준비했는데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봉준호 : "송강호, 김상경, 박노식 등 배우들과 함께 음성해설을 녹음했는데 마이크를 두 개만 사용해 그런지 음량이 작아 영화 속 효과음, 음악 등에 묻혀서 잘 안 들렸다. 제작사에 수정을 요구했는데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그 당시에도 이미 그는 워낙 꼼꼼하게 촬영을 준비해서 '봉테일'로 불렸다.

왜 그렇게 디테일을 강조하는지 이유를 물어봤다.

 

봉준호 : "디테일이 본질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게 핵심 퀄리티를 망칠 수 있다. 본질을 해칠 수도 있다."

 

봉 감독이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은 배우들과 스태프에 대한 배려도 있다.

봉준호 : "스태프가 헛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한다. 이런 결정을 신속하게 내리기 위해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 영악한 결정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확신을 보여주면 다들 좋아한다.(웃음)"

 

 

하지만 디테일을 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롱테이크로 길게 이어지는 샷에서는 더욱 그렇다.

 

봉준호 : "롱테이크 샷은 긴장도가 높아서 감독도 진이 빠진다. 촬영이 끝나면 그대로 쓰러져 잔다. 머릿속 계산과 맞아떨어지는지 수십 가지를 살펴야 해서 모니터에 집중한다. 생각했던 것에 80~90% 도달하면 OK 한다. 100% 도달은 없다."

 

롱테이크 장면 중에 특히 힘들게 찍은 장면을 물었다.

봉준호 : "비가 쏟아지는 전경 초소 장면이었다. 아이들이 비를 맞고 초소에 들어와서 비를 피하는 장면이었는데, 아이들이 연기 경험이 없어서 힘들었다. 아이들이 고생 많이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특이하게도 '살인의 추억'은 일본 작곡가 이와시로 타로가 음악을 맡았다.

의외였다.

 

왜 일본 음악가를 썼을까.

봉준호 : "제작사인 싸이더스 측에서 일본 음악가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몇몇 후보들을 좁혀 놓고 일본에 직접 가서 그들을 만나봤다. 타로의 음악은 특히 한국적이었다'바람의 검심' OST를 들어보고 한국적인 선율이 강하다고 느꼈다."

 

북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지는 타로의 음악 못지않게 인상적인 것은 살인을 예고하듯 흘러나오는 유재하의 노래 '우울한 편지'였다.

봉준호 : "시나리오 쓸 때부터 이미 그 노래를 생각했다."

 

송강호가 술집에서 부르는 '제비처럼'도 그럼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미 준비한 곡인가.

봉준호 : "그건 아니다. 모여서 다 같이 술 마시며 술집 장면에서 어떤 노래를 할지 고민하다가 '제비처럼'을 선택했다."

 

그럼 신중현이 작곡한 장현의 노래 '빗 속의 여인'은 어떻게 들어갔나.

봉준호 : "그 노래는 편집할 때 골라서 집어넣었다. 비가 쏟아지는 장면을 보면서 원래는 따로 작곡한 OST를 넣으려고 했는데 너무 늘어졌다. 그 부분(여경이 위장 수사를 위해 붉은 옷을 입고 산길을 혼자 걸어가는 장면)이 안 그래도 늘어지기 쉬운 부분이라서 탄력을 주고 싶었다. 연출부에도 비와 관련된 옛 가요를 제출하라고 했다. '빗 속의 여인'은 여러 가수가 불렀는데 그중에서 구수하고 우울한 느낌이 드는 장현씨 노래가 좋았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개인적으로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나무에 링거병을 걸어놓고 수액을 맞는 특이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큰 사건이 터져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시골형사들의 바쁜 일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토속적인 정감이 묻어나는 장소였다.

 

그 장소를 어떻게 찾았는지 물었더니 봉 감독이 하하 웃으며 알아봐 줘 고맙다고 했다.

봉준호 : "사실 그 장면에 나온 장소를 찾기 힘들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장소를 염두에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심지어 배를 빌려서 거기서 링거를 맞는 장면을 찍을까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다른 장소로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충청도 서천에 부엉 바위 저수지라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는데 순간적인 영감이 떠올랐다. 투박하며 서정적인 장소였다. 그곳에서 송강호에게 몇 가지 자세를 해보라고 했다. 그 장소를 찾은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봉 감독이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힘을 준 설정이 무엇인지 물었다.

속으로는 '수사반장' 시대로 대표되는 주먹구구식 억지 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봉준호 : "워커(전투화)를 신은 형사였다. 그의 워커 발은 응징이라는 콘셉트가 들어 있다. 거기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작용한다. 헥토르 바벤코 감독도 '워커 발 형사에 공감이 간다'라고 했다."

엄혹했던 군사 정권 시절에 군홧발로 대변되는 폭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의미했다.

 

반면 봉 감독은 송강호가 연기한 시골 형사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봉준호 : "사실 관객들은 송강호의 감정을 따라가며 영화를 보게 된다. 송강호가 연기한 배역이 안고 있는 모순된 느낌이 재밌었다. 막무가내식 형사였지만 인간 개인으로서는 연민이 가는 캐릭터다. 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80년대의 전형적인 인간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엘리트 형사와 비교해 학력 콤플렉스도 갖고 있고, 그래서 뒤틀린 심정을 들여다보면 연민을 많이 느끼게 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살인의 추억'은 엔딩도 그렇지만 인물의 클로즈업 샷이 많이 나온다.

봉준호 : "처음부터 얼굴이 중요했다. 얼굴이 보여주는 풍경이 특히 중요했다. 여러 사람이 영화에 등장하는데 얼굴마다 임팩트가 모두 다르다. 그런 것들을 각각 살리고 싶었다. 박해일의 경우 긴 트랙킹으로 얼굴을 찾아 들어갔다. 사실 천사의 얼굴을 보며 악마를 생각하는 부분은 모순이다. 이 부분은 개성 강한 얼굴에 지친 관객들에게 예쁜 얼굴을 보여줘 고정된 이미지를 씻어주자는 생각이 컸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잔인한 시퀀스일 수 있다. 얼굴의 클로즈업은 '얼굴만 보면 범인인지 아닌지 안다'는 송강호의 대사와 직결된다. 결국 그렇게 자신했던 그는 나중에 박해일의 얼굴을 보며 '모르겠다'라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렇게 어두웠던 한 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그렇게 꼼꼼하게 준비했는데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은 없었을까.

봉준호 : "대부분 삭제했다. 그런데 비 오는 날 여인이 공장에 있는 남편을 마중 가다가 죽는 장면은 마음에 안 들었다. 태풍에 벼가 쓰러지고 장비에도 문제가 생겼다. 거기에 건강도 안 좋았다. 원래 다른 분위기로 그 장면을 찍으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하지 못해 아쉽다. 백광호가 기차 사고를 당하는 장면도 여유롭게 찍지 못했다. 1주일에 한 번 공군부대로 기름을 실어 나르는 기차를 철도청에서 빌려서 찍었다. 하루 대여비용이 수천만 원이었다. 일정이 빡빡해서 낮에 다른 장면을, 밤에 백광호 사고 장면을 이틀에 걸쳐 몰아 찍었다."

 

'살인의 추억' 제작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봉준호 : "실제 사건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컸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모르다 보니 인터넷에 온갖 헛소문이 나돌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비교적 개요를 잘 정리해서 도움을 받고 싶었는데 워낙 민감한 사건이어서 협조를 받을 수 없었다. 그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준비과정에서 당시 신문기사 등 많은 자료를 모았는데 너무 많은 실명이 등장하고 끔찍한 사진들이 그대로 나와서 부담스러웠다. 그런 것들은 영화에서도 공개하기 힘들었다."

 

 

차기작에 대해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봉준호 : "3번째 영화를 준비 중이다. 아주 신기한 장르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다이내믹한 집단 재난 난투극이다.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내년 가을에 크랭크 인 하고 싶다."(나중에 알고 보니 '괴물'이었다.)

 

당시 그는 뮤직비디오도 하나 찍었다.

봉준호 : "영화를 끝내고 뮤직비디오를 해보고 싶었다. 한영애씨의 '외로운 가로등'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얼마 전에 끝냈다. 일제 시대 노래를 리메이크 한 건데 한영애씨 제안으로 하게 됐다. 이전에는 김돈규씨 뮤직비디오도 찍은 적이 있다. 박해일과 배두나가 출연했다."

 

봉 감독은 DVD 마니아로 소문나 있다.

어떻게 모으게 됐는지 물었다.

 

봉준호 : "김지운 감독 집에 놀러 가서 DVD를 처음 봤다. 감독이나 배우들의 코멘터리가 들어있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해피엔드'를 찍은 정지우 감독도 김지운 감독 때문에 DVD 마니아가 됐다. 김지운 감독이 DVD 전파자 역할을 했다."

 

블루레이 타이틀로 나온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

 

당시 봉 감독은 홈시어터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봉준호 : "뮌헨 영화제에서 '플란다스의 개'로 상을 타고 상금 2,500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홈시어터를 샀다. 야마하의 보급형 앰프와 파이오니아의 535K DVD 플레이어, 정체불명의 스피커 세트와 브라운관 TV를 갖췄다. 나중에 스피커는 하이비라는 하이파이 잡지에서 셀레스천 스피커로 업그레이드해줬다."

 

그때 봉 감독은 브라운관 TV 화면을 좋아했고 프로젝터를 불신했다.

그럴만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사용했다는 '마드리갈' 같은 3관식 프로젝터라면 몰라도 DLP 등 당시 보급형 프로젝터는 화질이 떨어졌다.

지금은 4K를 지원하는 레이저 프로젝터도 나오면서 프로젝터의 화질이 많이 좋아졌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섭섭한 화질이었다.

 

봉준호 : "브라운관 TV 화면을 좋아한다. 색감과 필름 느낌이 나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프로젝터는 그 단계가 아닌 것 같다. LCD도 싫다. 나중에 더 큰 브라운관 TV로 업그레이드하고 싶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그에게 타이틀 추천을 부탁했다.

봉준호 : "아, '존 말코비치 되기'를 추천한다. 서플과 코멘터리가 독특하고 재미있다. 심지어 엑스트라 인터뷰도 있다."

 

그다음부터 추천 목록이 줄줄이 쏟아졌다.

봉준호 : "크라이테리언 시리즈 중에 미국 고전 영화인 마이클 포웰 감독의 '흑수선'이 있다. 빛바랜 듯한 테크니컬러의 화질을 좋아한다. 필름 3개가 동시에 돌아가 아주 희한한 색감이 나온다."

 

봉준호 :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DVD도 괜찮다. 화질, 음향, 서플 등이 기억에 남는다."

봉준호 :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확장판은 궁극의 DVD다. 마치 성경책을 펼치는 느낌이다. 아마존에서 주문했다."

 

그는 해외에 가면 꼭 DVD 숍에 들린다고 했다.

봉준호 : "일본에서 '플란더스의 개'가 개봉했을 때 건너가서 도쿄의 시부야 DVD 숍에 들렸다. 신도 카네토 감독의 '도깨비'라는 60년대 흑백영화('오니바바' 인 듯)의 DVD 타이틀을 샀다. 화질과 음질 다 좋은데 영어자막이 없다. 왜 안 넣었을까, 아쉽다."

 

봉준호 :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유레카' DVD도 구입했다.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보고 인상 깊어 구입했다. 여기에는 영어자막이 들어있다."

 

DVD 타이틀 시절에 받았던 봉 감독의 사인이 든 표지를 블루레이 타이틀로 옮겨 놓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갖고 있던 '플란더스의 개' DVD 타이틀에 사인을 해달라고 내밀었다.

봉 감독은 의외였다는 듯 반가워하며 한바탕 웃었다.

 

봉준호 : "이 타이틀은 사운드에 아쉬움이 크다. 제대로 된 5.1 채널을 넣고 싶었는데. 불쌍한 상황에서 출시한 타이틀이다. 충분한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서로 DVD를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해서 그랬는지 일어서며 또 보자고 했고, 그러마 했는데 실제로 연락을 하지는 못했다.

아쉽고 궁금하다.

 

이제 봉 감독은 오포 205 4K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사용한다는데 다른 시스템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타이틀은 얼마나 늘었는지, 그리고 제대로 볼 시간은 있는지.

다시 볼 기회가 있기를.

 

봉 감독의 유명한 콘티를 그려 놓은 블루레이 타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