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티칸(Vatican)을 돌아보려면 끈기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다보니 휴가철처럼 사람들이 몰릴 때 방문하면 아주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어가 보면 워낙 훌륭한 볼거리가 많아 인내에 대해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다.
다만 생각보다 돌아볼 곳이 많다 보니 의외로 빨리 지치고 피곤할 수 있다.
[바티칸은 오전 9시부터 관람객을 받는다. 그런데 아침 7시부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다. 더운 여름에는 입장을 기다리다가 지친다. 입구 위 조각상의 주인공은 당대 거장이었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이다. 앙숙이자 서로의 실력을 인정했던 두 사람의 흔적은 바티칸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작품 보관 때문에 무더운 여름철에도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 곳이 여러 군데여서 더위와의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오랜 시간 둘러볼 계획이라면 물을 가져 가는게 좋다.
바티칸은 로마 안에서도 교황이 다스리는 별도의 독립국가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궁 등 로마의 5개 장소, 이탈리아 각지의 23개 장소를 영토로 하며 전세계 카톨릭 성당이 교황 치하에 있다.
[바티칸에 들어서면 피냐 정원에 있는 거대한 솔방울 장식을 볼 수 있다. 로마 시대 판테온 부근에 있던 분수대 장식을 옮겨왔다. 양쪽의 두 마리 청동 공작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무덤의 장식을 흉내낸 것이다.]
바티칸은 19세기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교황령을 상실했는데 1929년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으려는 무솔리니와 라테란 협정을 맺으면서 독립국가의 지위를 확보했다.
하지만 행정권만 갖고 있으며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했고 교황 경호 및 교황청 경비는 과거 용병 시절 맹활약한 스위스 근위병들이 맡고 있다.
원래 바티칸이라는 이름은 로마 제국 시절 바티에서 유래했다.
예언자란 뜻의 바티란 길흉화복을 점치던 무당을 말한다.
이들이 테베레 강 옆 언덕에 모여 살았는데 이 곳을 바티들의 언덕, 즉 라틴어로 몬스 바티카누스(Mons Vaticanus)라고 불렀다.
이교도들의 장소인 이 곳이 천주교의 총 본산이 된 것은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이며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바티칸의 벨베데레 정원에 있는 페르세우스 조각상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서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를 조각한 이 작품은 안토니오 카노바의 작품이다.]
로마 제국 시절 포교를 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한 베드로를 기려서 315년 성당이 처음으로 들어 섰다.
성당이 들어선 자리는 로마 제국 시절 네로 황제와 칼리굴라 황제의 원형 극장이 있었으며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도 있던 장소다.
뿐만 아니라 몰래 숨어서 종교를 믿던 천주교인들과 이교도인들의 무덤도 있다.
이 모든 유적들이 지금도 성 베드로 대성당 밑에 잠들어 있다.
여기에 6세기경 교황 심마쿠스가 교황의 거처를 마련했고 이를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궁으로 결정했다.
이후 교황 니콜라스 5세가 1452년 건축가 겸 조각가인 베르나르도 로셀리노에게 증축을 맡기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벨베데레 정원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작자 미상의 라오콘 군상이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신관으로, 목마를 가져오면 트로이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트로이 사람들이 목마를 끌어오자 라오콘이 창으로 목마의 배를 찔러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의 심장을 꿰뚫는다. 그리스의 비책이 들통날 위기의 순간 아테네 여신이 거대한 뱀을 보내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물어 죽이게 했다.
이 조각에는 세 부자가 겪는 끔찍한 고통이 표정과 근육, 자세에 역력히 살아 있다.
원래 이 조각은 최초 발견 당시 어깨쪽으로 구부러진 오른팔이 없었다. 이를 미켈란젤로에게 복원을 맡겼는데 해부학을 공부한 그는 왼팔의 자세와 몸의 방향, 근육 움직임 등을 보고 오른팔이 구부러졌을 것이라고 유추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작품이 멋있을려면 오른팔을 위로 뻗쳤을 것이라며 미켈란젤로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러나 1905년 뒤늦게 오른팔이 발견됐는데 미켈란젤로의 의견처럼 구부러진 상태였다. 지금 전시된 조각상은 이 오른팔을 붙여 놓았다.]
바티칸의 증축은 단기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1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쳤다.
그동안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라파엘로, 베르니니 등 위대한 미술가와 건축가들의 손을 거쳤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내부는 1506년 브라만테가 설계했고, 둥그런 돔은 1547년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
베드로 대성당의 전면은 1606년 카를로 마데르노의 손길을 거쳤으며 산 피에트로 광장, 즉 성 베드로 광장과 이를 둘러싼 포럼 등은 1656년 베르니니가 설계했다.
그만큼 바티칸은 건축과 미술의 보고다.
신과 동격으로, 숱한 유럽 황제들까지 발 밑에 둔 최고 권력이었던 교황의 영광과 권위를 기리기 위한 장소였던 만큼 온갖 보물들이 모일 수 밖에 없었다.
[교황의 경호와 교황청 경비를 맡은 스위스 근위대. 과거 용병 시절 교황의 곁을 끝까지 지킨 전통 때문에 지금도 이들이 교황의 경호를 맡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과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라파엘로관 등을 둘러보면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교황 시스토 4세가 세운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이 서거하면 다음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추기경들의 회의, 즉 콘클라베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교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원래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성당에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뒤 고민 끝에 천장과 전면 벽에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시스티나 성당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 자료 사진]
사진으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그림을 실제로 보면 거대한 위용에 놀라 절로 입이 벌어진다.
미켈란젤로는 높이 13미터, 길이 40미터, 폭 14미터의 성당 천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거대한 구조물을 세운 뒤 누워서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성당 사방 벽에 보티첼리, 로셀리 등 소위 명장들의 그림들이 쭉 이어져 있는데 이를 누르고 꼭대기에 그림을 그리겠다니 기고만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천장화를 비롯해 전면 벽에 '최후의 심판' 등 프레스코화를 1535년부터 1541년까지 6년에 걸쳐 그렸다.
그림을 보면 당장이라도 인물들이 뛰쳐나올 것처럼 역동적이다.
여인들의 뭉글뭉글한 살덩이와 남성들의 힘이 꽉 들어간 근육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미켈란젤로는 젊디 젊은 근육질의 예수를 비롯해 대부분의 인물들을 나체로 그렸다.
그러나 교황청은 23년 뒤 신성모독이라며 벌거벗은 인물들의 몸 위에 천을 덧입히는 식으로 수정했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종교적인 결정이 예술품을 훼손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자료 사진]
최후의 심판 그림 속에는 미켈란젤로도 있다.
예수의 발 아래 쪽에 보면 성 바르톨로메오가 벗겨진 살가죽을 들고 있는데 이 살가죽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성인들 앞에 선 자신을 눈이 멀고 살가죽이 벗겨진 죄인으로 묘사했다.
가죽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에서 전도를 하다가 잡혀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한 성인이다.
이 밖에 로마제국 개종을 거부한 카탈리나 성녀는 상의가 벗겨진 채 칼날이 꽂힌 수레바퀴를 목에 두르고 걷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처형 당했는데 그림 속에 이런 모습으로 묘사됐다.
또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수호 성인인 성 블라시오도 그의 상징인 쇠빗 2개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림 속에 등장한다.
수염을 휘날리는 신이 내뻗은 손과 젊고 미끈한 아담의 손 끝이 닿을락 말락한 아담의 창조라는 부분 그림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인 천지창조는 고개를 뒤로 젓힌 채 올려다 봐야 한다.
신이 세상을 만드는 위대한 순간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림이지만 한참 보노라면 목이 뻣뻣하게 굳어 온다.
역시 최후의 심판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예술가의 천재적인 솜씨에 장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안타까운 점은 이 곳에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시스티나 성당의 위용. 자료 사진]
일본 NHK가 때와 연기에 찌들은 그림들을 말끔하게 복원하는 비용을 전액 제공하면서 복원 기술도 제공받고 영상권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는데 곳곳에 서 있는 감시인들에게 걸리면 바로 사진을 삭제당하고 주의를 받게 되며, 여러번 되풀이하면 강제로 끌려 나간다.
시스티나 성당 뿐 아니라 수많은 태피스트리들이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방과 지도의 방, '아테네 학당'이 있는 라파엘로관도 빼놓을 수 없다.
태피스트리방은 중세 이탈리아 사람들이 바닥에 까는 것이 아니라 감상용으로 벽에 거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들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를 아라찌(arazzi)라고 불렀는데, 대부분 성경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
태피스트리 방을 지나 가면 이탈리아 각 지역 지도를 거대하게 그려 놓은 지도의 방을 만날 수 있다.
[지도의 방. 양 옆에 지도와 함께 천장을 장식한 황금빛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각 지역 지도도 눈길을 끌지만 그보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천장이 더 인상적이다.
위대한 화가였던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아 놓은 라파엘로관은 '아테네 학당' 때문에 붐비는 곳이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아테네 학당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론을 하며 들어서는 주위에 유명한 철학자들이 흩어져 토론을 하거나 연구를 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라파엘로는 재미있게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얼굴을 앙숙이었던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당대 유명 예술가들의 모습을 빌려 그렸다.
[라파엘로 관에서 가장 유명한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 손을 위로 치켜 든 플라톤과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걸어 들어오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얼굴들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모습으로 들어 있다.]
각 전시관을 둘러보고 종착역처럼 들리게 되는 베드로 대성당은 한마디로 '어마무시'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이 곳은 축구장 3개 크기의 거대한 실내 규모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6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이 곳은 어찌나 큰 지 파리의 노트르담,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 등 다른 나라의 대형 성당들도 이 안에 쏙 들어간다고 한다.
지금도 교황청은 성당 중의 성당인 베드로 대성당을 능가하는 규모의 성당 건립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베드로 대성당의 위용. 원래 바티칸은 어깨를 드러낸 민소매나 무릎이 드러난 반바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는 입장할 수 없다. 그래서 스카프를 사서 어깨를 가리거나 치마처럼 두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성당 안에서는 모자를 쓰거나 바닥에 앉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용트림하듯 올라간 교황석과 사방에 놓인 수 많은 조각들, 모자이크화 등을 보면 놀라운 신의 권위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내부에 설치된 조각상이 400개, 모자이크화는 1300점 이상이다.
이 중에서 가장 압권은 성당 입구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이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를 안은 채 슬픔에 잠긴 모습을 조각한 감동적인 이 작품은 절로 숙연하게 만든다.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
다른 조각작품들과 달리 피에타는 전면에 세운 투명 유리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1972년 왠 정신병자가 자신의 어머니와 닮지 않았다며 커다란 망치를 휘둘러 성모의 얼굴과 왼손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성모의 코가 떨어져 나가고 얼굴 여기저기에 곰보자국처럼 흠집이 났으나 놀라운 복원 기술 덕분에 다시 예전의 모습을 말끔하게 되찾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공원도 어느 미치광이가 조각을 깨트린 적이 있는데, 이런 뜻하지 않은 만행들이 일어나니 아쉽지만 작품 보호를 위해 관람 제한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교황만 설 수 있는 발다카노. 베르니니의 작품인 29미터의 발다카노는 판테온에서 뜯어온 청동을 녹여서 만들었다. 멀리 후광이 빛나는 곳은 교황의 의자다.]
성당 꼭대기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커다란 돔이 있다.
성당 바닥부터 돔의 내부 천장까지 높이가 무려 119미터, 외부의 십자가까지 포함하면 136미터 높이의 거대한 돔이다.
이 곳도 별도 입장료를 내면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꼭대기까지 가려면 위로 갈 수록 좁아지는 551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성당의 돔, 즉 큐폴라 내부를 올려다 본 모습. 올려다보면 워낙 높아서 위용을 짐작하기 힘든데, 글자 하나의 크기가 2미터다. 실제로 위에 올라가 보면 엄청난 높이와 크기에 깜짝 놀라게 된다. 이 곳에 거대한 글자들로 '너는 베드로다...'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이 적혀 있다.]
힘들면 중간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머지 320계단을 걸어 갈 수 있는데, 이 경우 처음에 표를 구입할 때 엘리베이터 비용을 내야 한다.
힘들더라도 올라가 볼 만하다.
정점에 서면 로마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로마는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에 정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성당 건축에 참여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참으로 위대했다.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 곳곳에 설치된 조각들이다. 아래보다 위쪽에 설치된 조각을 더 크게 만들어 멀리서 보면 원근법에 의해 크기가 비슷해 보이도록 했다. 아기 천사 하나가 2미터 가까이 될 만큼 조각들이 거대하다.]
특히 큐폴라로 부르는 돔을 올라가 봐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광장을 비롯해 전체적인 외관을 어떻게 설계했는 지가 이 곳에서만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놀랍게도 베드로 대성당과 광장, 이를 둘러싼 회랑이 거대한 열쇠 모양을 이루고 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베르니니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이 열쇠 모양은 바로 베드로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를 의미한다.
[큐폴라에 올라가 내려다 보면 바티칸의 상징인 열쇠 모양을 이루는 성 베드로 광장.]
베드로의 열쇠는 바티칸의 국가 상징이기도 해서 전세계 천주교 성당 어디에나 두 개의 열쇠가 교차하는 문장이 있다.
교황좌 바로 위에 위치한 돔 내부에도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며,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는 마태복음 16장 18, 19절이 새겨져 있다.
성당을 나서면 광장 한 복판에 뜻밖에도 이교도의 상징인 높이 25.5미터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로마 제국 시절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빼앗아 온 물건으로, 이 위에 십자가를 붙여 놓았다.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이집트에서 가져 온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바티칸에 쓰인 이교도의 유물들은 오벨리스크 뿐만이 아니다.
피에타에서 가져온 청동과 콜로세움에서 뜯어온 석재들이 성당 여기저기에 쓰였다.
무지와 오만의 시대에 벌어진 일들이기는 하지만 결코 이런 모습들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벨리스크는 바티칸의 영광과 과오의 상징인 셈이다.
[성 베드로 대성상의 전면. 좀 떨어져 봐야 위에 큐폴라가 보인다.]
[베드로 대성당의 놀라운 모자이크화.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모두 조각들을 하나 하나 꿰어맞춘 모자이크다. 처음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림인 줄 알았다가 가까이 가서 보고 깜짝 놀랐다.]
[베드로 성당 앞쪽 골목에 있는 유명한 파나니집. 아주 맛있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의 변화-판테온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0) | 2016.07.31 |
---|---|
로마의 시작-팔라티노, 포로로마노, 콜로세움 (0) | 2016.07.24 |
피엔자, 몬탈치노, 반뇨 비노니 (0) | 2016.07.14 |
로마의 야경 (2) | 2016.07.09 |
영화 '아멜리에'의 몽마르뜨 (3) | 2016.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