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남동쪽 유적지를 돌아보려면 치르코 맛시모, 팔라티노,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를 한꺼번에 묶어서 돌아 보는게 좋다.
단, 포로 로마노의 경우 햇볕을 피할 만한 그늘이 많지 않으니 한여름에는 볕이 강한 오후 12~3시 사이에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다.
* 치르코 맛시모(Circo Massimo) *
[드넓은 공터인 치르코 맛시모. 건너편에 팔라티노 언덕이 보인다.]
찰튼 헤스톤이 주연했던 영화 '벤허'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전차 경주다.
벤허를 시기해 죽이려는 메살라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전차 경주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데, 로마 제국 시절 전차 경주가 벌어진 곳이 바로 치르코 맛시모이다.
아벤티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 얕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이곳은 원래 이름이 라틴어로 대경기장이라는 뜻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였다.
이를 요즘 이탈리아인들은 치르코 맛시모라고 부른다.
로마 최대의 전차경기장이었던 이 곳은 에트루리아 계열의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배수 공사를 하고 만들었다.
이를 기원전 50년전 시저,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약 2만7,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확장했다.
당시 길이 621미터, 너비 150미터의 초대형 경기장이었던 이 곳은 나중에 27만명을 수용할 정도로 커졌다.
U자형 구조의 경기장은 3면에 좌석이 있고 한가운데서 전차경기와 축제 등을 벌였다.
[팔라티노에서 내려다 본 대경기장]
원래 경기장 복판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있었는데 포폴로 광장 중앙으로 옮겨 놓았다.
로마 제묵은 9월에 로마대제전이라는 축제를 벌였는데 이때 하일라이트가 바로 전차경주였다.
워낙 격렬한 시합이어서 경기 도중 선수들이 죽기도 했으나 시합 도중 죽은 사람보다 관중석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 더 많다.
기록을 보면 한꺼번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때 1,112명,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무려 1만3,000명이 죽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장사가 잘되기 마련, 이 곳에도 주변에 상점과 음식점들이 들어섰고 심지어 집창촌까지 등장했다.
그렇다 보니 사고도 잦았는데, 네로 황제 시절인 64년에 이곳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전체 도시로 번지며 로마를 홀라당 태웠다.
마지막 전차경기는 549년에 벌어졌으며, 지금도 이 곳에서는 대규모 공연이나 축제 등이 벌어진다.
특히 월드컵 대회 때는 이 곳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해 놓고 사람들이 모여서 경기를 보기도 한다.
이 곳은 직접 가봐야 허허벌판이어서 그다지 볼 게 없다.
귀퉁이에 예전 유적이 있긴 하지만 굳이 내려가 볼 것 까지는 없고, 오히려 팔라티노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더 낫다.
[대경기장에서 팔라티노를 향해 가다 보면 볼 수 있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수도교. 로마제국의 특징 중 하나인 수도교는 멀리서 물을 끌어오는 상수도 시설이다.]
* 팔라티노(Palatino) *
치르코 맛시모를 지나 콜로세움을 향해 조금만 걸어가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만든 상수도교가 보이고 이를 지나면 왼편에 팔라티노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로마의 일곱개 언덕 중 하나인 팔라티노는 로마가 시작된 역사적인 곳이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테베레 강변 언덕에 나라를 세우기로 하고 장소를 찾다가 살기 편하고 방어하기 쉬운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을 최종 후보지로 정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레무스는 아벤티노를 고집하는데 내기를 벌인 결과 로물루스가 이겼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궁전 바로 옆에 만든 공간. 경기장처럼 생겨서 스타디움(stadium)으로 부른다. 스타디움은 그리스의 길이 단위인 스타디온에서 유래한 말이다. 1스타디온은 185미터.]
로물루스는 이 곳에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명명한 뒤 팔라티노 꼭대기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성곽을 쌓고 신성한 영역을 정했다.
그런데 내기에 져서 화가 난 레무스가 성곽을 부수고 신성한 영역에 침범했다.
이에 분노한 형 로물루스는 그 자리에서 삽으로 동생 레무스를 때려 죽였다.
팔라티노 안쪽에는 로물루스가 살았던 움막 터가 있다.
[팔라티노 안쪽에는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의 움막터로 알려진 흔적들이 남아 있다.]
로마 제국 사람들은 로물루스가 정한 성역에 트라야누스 황제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2세기부터 귀족들이 이 곳에 집을 지으면서 고급 주택지로 변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 곳을 좋아해 집을 구입해 여기서 살았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집 옆에 도무스 티베리나라는 궁전을 지었다.
그때부터 이 곳이 궁전 지역으로 변했다.
대형 건축물을 많이 세운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이 곳에 궁전을 짓고 건너편에 콜로세움까지 세웠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궁전은 집무 공간인 도무스 플라비아와 사저인 도무스 아우구스타나로 구분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저인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위에서 내려다 보면 꽤 높다.]
워낙 전제군주였던 그는 밀고제도를 강화하며 원로원을 짓누르는 등 공포정치를 펼쳤다.
그렇다 보니 적이 많아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할까봐 집무실 벽에 거울처럼 비치는 대리석을 붙여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96년 침실에서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암살당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궁궐터에서 건너다보면 전차경기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집무 공간이었던 도무스 플라비아.]
네로 황제도 아우레아 궁전을 만들었고, 멀리서 끌어온 물로 채운 인공 연못과 수영장 등을 조성했다.
팔라티노는 영어의 궁전을 뜻하는 palace의 어원이 된 곳이기도 하다.
라틴어 명칭은 목동들의 여신 팔레스(pales)에서 유래한 몬스 팔라티누스(mons palatinus)였는데 로마인들은 이를 줄여서 팔라티움(palatium)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궁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팔라쪼(palazzo)가 나왔고, 다시 영어의 palace가 탄생했다.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h of Constantine) *
[콜로세움 앞쪽에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팔라티노를 나와 위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콜로세움이 함께 보인다.
이 문은 포로 로마노 입구인 티투스 개선문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함께 로마 제국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3개의 개선문 가운데 하나다.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 만든 문이다.
밀비우스 전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중요한 싸움이다.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통치 체제가 4명이 다스리는 4두정치 체제로 바뀌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수도를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로 옮긴 뒤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눴다.
동부는 황제 자신이 다스리고 서부는 수도를 밀라노로 옮겨 막시미아누스 장군에게 맡겼다.
여기서 또 황제의 유고를 대비해 부황제를 각각 1명씩 뒀다.
그리고 황제의 임기를 무조건 20년으로 제한했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죽자 막시미아누스의 부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상부에 트라야누스 황제 포룸에서 뜯어온 다키아 전쟁 포로 석상들이 서 있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반기를 들어 스스로 황제를 지칭하며 싸움을 벌였다.
이에 맞선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27일 삭사 루브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몰아 붙였다.
막센티우스 군대는 좁다란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 퇴각하려다가 일방적으로 도륙을 당했고, 막센티우스도 부교가 뒤집혀 테베레 강에 빠져 시체도 찾지 못했다.
제국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는 이 싸움을 기념해 당시 점령했던 비아 트리움팔리스 자리에 높이 21미터, 폭 25.7미터, 두께 7.4미터의 개선문을 세웠다.
특이한 것은 이 개선문은 여러 황제들의 기념물을 뜯어다 만든 재활용품이라는 점이다.
황제의 얼굴은 하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얼굴에서 수염을 깎아내 사용했고, 상부의 석상들은 트라야누스 황제 포룸에서 가져온 다키아 전쟁 포로 석상들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인정하는 종교 중 하나로 선포했다.
이때부터 자유롭게 기독교 포교가 가능했는데, 원래 태양교 신자였던 황제는 이후 태양교 전통들을 기독교에 적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와 일요일이다.
그는 알 길 없는 예수의 생일을 태양신의 생일인 12월25일로 정했고 태양신에게 바치는 축제의 날인 일요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 콜로세움(Colosseum) *
[콜로세움은 217년에 화재, 442년 지진으로 손상됐다.]
콜로세움은 로마하면 우선 떠오르는 상징같은 건축물이다.
둥그스름한 타원형의 이 건축물은 공연을 하거나 검투사들이 시합을 벌인 원형 극장이다.
5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시설인 이 곳은 긴 쪽의 길이 188미터, 짧은 쪽 156미터이며 둘레 527미터, 4층 외벽의 높이가 48미터다.
네로 황제가 자살한 뒤 68년 왕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72년 착공해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80년에 완공했다.
[콜로세움은 워낙 유명한 관광지이다 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아침 일찍 가는 게 좋다.]
플라비우스 가문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포로들을 시켜 네로 황제 궁전에 딸린 인공 호수를 메우고 이 건물을 지었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가문이 만든 원형 극장이라는뜻의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amphitheatrum flavium)이다.
암피(amphi)는 쌍방, 양쪽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당시 그리스인들은 한쪽은 벽으로 된 반원형 극장을 이용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은 극장 두 개가 마주 보도록 만들어 양쪽에 무대가 위치한 원형 극장을 구성했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영어의 극장인 theater도 바로 볼거리를 주는 장소라는 뜻의 테아트룸(theatrum)에서 나왔다.
[콜로세움 지하에 있던 창고 및 검투사 대기 공간 등의 구획이 보인다.]
극장 옆에는 원래 35미터 높이의 네로 황제 황금동상인 콜로수스(colossus)가 서 있었다.
이를 후대 황제들은 얼굴만 태양신으로 바꿔 그대로 뒀는데, 여기서 유래한 콜리에수스 또는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중세부터 쓰였다.
극장은 참으로 독특하다.
1층은 힘이 느껴지는 두꺼운 기둥의 도리아식과 토스카나 양식으로 만들었고 2층은 그보다 여성스런 곡선이 살아 있는 이오니아식, 3층은 가볍고 날렵한 모양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웠다.
각 층에 객석이 있었는데 신분과 성별에 따라 1층에 황제와 베스타 여신, 원로원 의원들이 앉았고 2층에 귀족과 장군들, 3층에 로마 시민권자, 4층에 여자와 노예 및 빈민들이 자리했다.
맨 꼭대기에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천막으로 만든 벨라리움(velarium)이라는 지붕을 설치해서 평소에 열어 놓았다가 비가 오거나 햇볕이 따가오면 이를 펼쳐 가림막으로 사용했다.
경기장 바닥은 나무를 깔고 그 위에 라틴어로 아레나라고 부르는 모래를 덮었다.
원형 경기장을 뜻하는 아레나(arena)는 여기서 유래했다.
한때는 경기장에 물을 끌어다가 배를 띄우고 해전을 재현하기도 했으나 배수 문제 등으로 이는 폐지됐다.
바닥 밑에 지하실을 마련해 창고를 뒀고 검투사들이나 맹수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콜로세움은 1층과 3층 등을 올라가 볼 수 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나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 때문에 유명한 검투사는 글라디아토르라고 불렀다.
로마군의 짧은 양날 제식용 칼 글라디우스에서 유래했다.
이 곳은 몰래 기독교를 믿다가 잡혀 온 사람들이 맹수와 싸우다가 죽어간 순교의 장소로도 알려졌는데 실제 기록과 다르다.
로마인들의 기록에는 학살 내용이 없으나 그렇게 알려지면서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1744년 이 곳을 순교의 성지로 정하고 십자가를 세웠다.
역설적인 것은 중세 시대 귀족이나 기독교인들이 저택이나 성당을 짓기 위해 이 곳의 건축자재를 마구 뜯어갔는데 베네딕트 14세가 성지로 만들면서 더 이상 파괴되지 않았다.
중시시대에 교회로 쓰이기도 했으며 로마의 귀족 집안인 프란지파네와 안니발디는 요새로 사용하기도 했다.
* 포로 로마노(Foro Romano) *
[콜로세움에서 바라 본 포로 로마노 입구. 포로 로마노는 입구가 여러 개인데 콜로세움을 보고 넘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이쪽 입구가 가장 붐빈다.]
콜로세움을 나와 멀리 언덕에 보이는 티투스 개선문을 향해 걸어가면 포로 로마노 입구가 나온다.
팔라티노와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는 모두 입장료를 내야 한다.
워낙 유명한 곳이어서 장시간 줄을 서야 하는데, 로마패스를 끊으면 좀 빨리 들어간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름철에는 관광객이 워낙 몰려 별 차이 없다.
참고로 로마 패스를 갖고 있으면 콜로세움과 팔라티노, 포로 로마노 가운데 두 군데를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로마 공회장이라는 뜻의 포로 로마노는 약 1,000년간 이어진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와 행정, 생활, 종교시설이 집중된 심장부다.
더러 공회장이라는 뜻의 포로(foro)를 광장으로 잘못 알기도 하는데, 이탈리아에서 광장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심 공간을 말하는 것이어서 서로 다르다.
[세베리우스 개선문이 멀리 보인다. 오른편 커다란 건물이 바로 원로원이다.]
원래 포로 로마노 지역은 물이 고이는 습지여서 사람이 살기 힘들다.
다만 주변 언덕들이 마주치는 곳이어서 사람들이 모이기 쉽고 방어에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습지를 흙으로 메우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 곳을 신성한 곳으로 삼은 포메리움의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바깥이라는 뜻의 라틴어 포룸(forum)으로 불렀다.
영어의 포럼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파생됐다.
이후 에트루리아계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이 곳을 본격 개발했다.
[아직도 기둥이 튼튼하게 버티고 선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몇 천년 전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엿볼 수 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와 로마 남부 일대를 차지한 당시 선진국으로, 아치 공법을 사용할 줄 아는 등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치수 관리에 능했다.
그래서 에트루리아계 제 7대 왕 타리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이 곳에 대규모 하수도망을 건설해 장마철에 물이 넘쳐나는 문제와 위생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망한 뒤 이 곳은 폐허가 됐다.
중세 시대에는 귀족과 기독교인들이 각종 조각과 건축물을 마구 뜯어가 건축 재료로 썼다.
심지어 고대 대리석 조각들을 에 태워 석회 재료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폐허가 된 포로 로마노는 1871년에 발굴되면서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됐다.
[포로 로마노에 서 있는 두 개의 개선문 가운데 콜로세움쪽에 가까운 틴투스 개선문.]
포로 로마노에는 두 개의 개선문 있다.
콜로세움 쪽에 가까운 티투스 황제 개선문(Arco di Tito)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형 티투스 황제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예루살렘 전투를 기념해 81년 세운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이 문을 지나 중심가인 사크라 거리를 지나다보면 오른편에 기다란 아치 모양의 건물이 나오는데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di Massenzio)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죽은 막센티우스가 공사를 시작했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완성했다.
[포로 로마노의 귀족 저택에서 건너다 본 왼쪽 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훗날 브라만테는 웅장한 이 건물을 토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했다.
사크라 거리 왼편에 위치한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은 로마 제국의 성화를 1,000년 동안 밝혀 온 곳이다.
미네르바 여신과 로마의 번영을 위한 성화를 밝힌 이 곳에는 귀족 자제 가운데 선발된 소녀 7,8명이 30년간 순결을 지키며 베스타 신관으로 머물렀다.
만약 베스타 신관들이 순결을 잃으면 생매장 당했다고 한다.
[왼편에 보이는 기둥만 남아 있는 건물이 베스타 신전이다.]
[베스타 신녀들이 살았던 집터. 바로 앞쪽에 조그맣게 베스타 신전이 보인다.]
신전 뒤로 이들이 살았던 베스타 신관들의 집 터가 남아 있다.
베스타 신전 옆쪽에 보면 조그만 삼각형 지붕을 씌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신전이 있다.
이 곳에서 카이사르 황제가 화장됐다.
그를 흠모했던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9년 카이사르를 신격화해 신전을 만들었다.
[포로 로마노에 위치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신전. 따가운 햇볕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 보니 이 곳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다.]
이 신전에서 캄피돌리노 언덕을 향해 보면 앞쪽에 또하나의 개선문이 보이는데 바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이다.
세베루스 황제와 두 아들 카라칼라, 제타의 승전을 기념해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이 203년에 세웠다.
뛰어난 무인이었던 세베루스 황제는 영국까지 영토를 넓혔으나 211년 지금의 요크인 에부라쿰에서 65세를 끝으로 타계했다.
[캄피돌리노 언덕에서 내려다 본 포로 로마노. 왼편에 세베루스 개선문이 서 있다.]
황제가 죽은 뒤 로마는 대혼란에 빠졌으나 장남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죽이고 반대파를 숙청해 정권을 잡았다.
카라칼라는 이후 동생의 기록을 모두 지웠고 개선문 상부에 남아 있던 이름도 파내 버렸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 오른편에 위치한 붉은 벽돌 건물이 원로원(Curia)이다.
로마 제국의 국회 역할을 했던 원로원 건물은 기원전 670년에 축조됐다.
[삼각 지붕이 포로 로마노의 원로원 건물이다.]
이 곳에서 카이사르가 암살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는 이 곳이 아닌 원로원 회의가 종종 열렸던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의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죽었다.
카이사르는 정적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뒤에도 예우 차원에서 석상을 놔뒀는데 그 아래서 살해됐다.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 카이저(kaiser), 러시아어 짜르(Tsar)는 모두 시저,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원로원 건물 뒤로 성당처럼 보이는 건물은 로마 제국 시대 포로로 잡힌 적장들이 갇혀 있다가 처형당한 감옥 마메르티눔이다.
[카이사르 동상 뒤로 보이는 성당 아랫쪽이 로마 시대 감옥인 마메르티눔 유적이다.]
이 곳에 베드로와 바울도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포로 로마노에는 바실리카들이 아주 많다.
바실리카란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공건물을 말한다.
베스타 신전 뒤쪽 언덕 위에는 로마 시대 귀족의 집도 남아 있다.
[포로 로마노에 우뚝 서 있는 율리아 바실리카.]
돌집이어서 그런지 볕이 따가운 한여름에도 내부는 서늘하다.
포로 로마노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는 캄피돌리노 언덕이다.
광장을 둘러본 뒤 시청사 뒤편으로 내려가면 포로 로마노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왼쪽 기둥이 로마 시대 국고가 있던 시투르누스 신전, 오른편 기둥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신전이다. 그 뒤로 왼쪽에 캄피돌리노 언덕이 있다. 캄피돌리노 광장에서 시청쪽으로 돌아 내려온 사람들이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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