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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블루레이)

울프팩 2017. 1. 3. 05:57

시작은 장난이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독자들의 시나리오를 투고받는 시나동이라는 코너를 운영했다.

 

자원 봉사자들로 구성된 모니터링팀은 여기 올라온 글을 읽고 괜찮으면 현역 프로듀서에게 전달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여기에 직접 쓴 시나리오를 익명으로 올리는 장난을 생각했다.


장난처럼 시작된 영화

 

실제 올리지는 않았으나 이때 슌지 감독이 쓴 몇 장의 원고가 훗날 '릴리 슈슈의 모든 것'(All About Lily Chou Chou, 2001년)의 원안이 됐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완성되지 않은 원고를 토대로 2000년 인터넷 게시판에 연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방식이 독특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게시판을 열어 놓고 글을 읽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쏟아낼 수 있도록 했다.

 

곧 수 많은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와이 슌지 감독의 원고와 독자들의 의견들이 마구 뒤섞였다.

결국 어떤 것이 가상의 소설이고 어떤 것이 의견인 지 구분이 어려워지면서 현실과 허상이 혼재됐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 같은 방식을 그 해 영화로 제작하며 그대로 옮겼다.

내용은 릴리 슈슈라는 가수를 좋아하는 주인공 소년과 또래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 발랄한 청소년 성장 영화가 아니다.

일본에서 사회 문제가 됐던 또래들의 왕따와 같은 반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해 원조 교제를 시킬 만큼 잔인하고 가혹하며 어두운 이야기들이다.


기본 줄거리는 있지만 여기에 릴리 슈슈라는 가상의 가수를 좋아하는 팬클럽의 의견이 영화 중간에 자막 형태로 섞이면서 이와이 슌지 감독이 쓴 인터넷 소설과 같은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예전 국내 출시됐던 이 작품의 DVD 부록에 들어 있는 제작진 인터뷰를 보면 감독은 "인터넷이 없었으면 이 영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인터넷이 이 영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인터넷과 더불어 이와이 슌지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중요하게 삼은 것은 14세라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나이다.


꽃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14세


마찬가지로 제작진 인터뷰를 보면 이와이 슌지 감독은 "14세라는 나이가 인생에 있어서 여러가지를 받아들이는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정의했다.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 등으로 표현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때 자신의 내면과 끊임없이 싸우고 질문을 많이 던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당시 일본 청소년 범죄율이 증가하는 사회현상도 주목해 보고 이를 영화에 투영했다.


이 같은 현상은 왕따라고 표현하는 따돌림, 즉 이지메와 원조교제, 살인사건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됐다.

그만큼 이 작품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구성적인 실험과 청소년기에 대한 사유가 함께 녹아 있다.


그래서 감독은 "내 인생의 유작을 고르라면 이 영화를 선택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을 아꼈다.

내용이 어두워서 흔히 블랙 이와이 계열로 꼽히는 작품이지만 이와이 슌지 감독 특유의 감수성이 살아 있는 영상은 여전하다.


푸른 논 사이에 서 있는 소년을 사선으로 기울여 찍은 장면과 높다란 하늘과 연, 소녀가 함께 서 있는 부감샷 등은 한 편의 CF 같다.

오히려 서정적인 영상은 어두운 내용과 대비되며 등장인물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강조해 더 애잔하게 보인다.


더불어 형식적인 실험도 가미했다.

소년들이 오키나와로 놀러간 장면들은 배우들이 직접 캠코더를 들고 촬영해 철저하게 순수한 소년들의 시각에서 만들었다.


대신 영상이 거칠고 심하게 흔들린다.

서정적인 영상 못지 않게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음악이다.


고바야시 다케시가 담당한 오리지널 스코어도 좋았지만 영화 곳곳에 드뷔시의 아름다운 클래식이 흐른다.

영화 제목이자 극중 가상의 가수인 릴리 슈슈는 드뷔시와 관련이 깊다.


드뷔시의 여인들


바람둥이였던 드뷔시는 숱한 여성을 만난 끝에 한 여인과 수년 간 동거했으나 결혼은 동거한 여인의 친구와 했다.

그 여인의 이름이 로잘리 텍시에였고 드뷔시는 릴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드뷔시는 결혼 후 제자의 어머니인 엠마라는 여성과 다시 바람을 피웠다.

그 바람에 부인 릴리가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드뷔시는 결국 릴리와 이혼하고 엠마와 동거했다.


그때 엠마가 딸 클로드를 낳았다.

드뷔시는 딸을 슈슈라고 부르며 아주 예뻐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드뷔시 인생에 있어 중요한 여인이었던 릴리와 슈슈를 결합해 제목 및 가상의 가수 이름으로 사용했다.

드뷔시를 둘러싼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여인들의 관계는 주인공 소년이 좋아했지만 지켜주지 못한 피아노치는 소녀와 원조 교제 소녀의 관계로도 이어진다.


드뷔시가 작곡한 꿈 꾸는 듯한 선율의 '아라베스크', '달빛', '아마빛 머리의 소녀' 등도 영화 속에서 서정적인 영상과 더불어 아름답기에 슬픔을 배가시키는 역설적인 장치가 됐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비극적이면서 아름답고, 어두우면서도 서정적인 역설의 미학이 작용하는 영화다.


1080p 풀HD의 1.78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색감이 선명하고 화질이 좋다.

일본 영화 중에 처음으로 촬영에서 상영까지 디지털로 작업한 만큼 그 효과가 블루레이로 잘 나타났다.


LPCM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소리의 이동성이 좋지만 서라운드 효과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부록은 안타깝게도 예고편이다.


과거 국내 출시된 두 장짜리 DVD에 수록된 제작과정, 뮤직비디오 등이 수록됐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원안이 된 슌지 감독의 인터넷 소설은 릴리 슈슈의 콘서트 현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슌지 감독은 독자들이 살인사건의 수수께끼를 풀도록 유도해 많은 사람들이 글에 참여하도록 했다.

주인공 소년이 좋아하는 릴리 슈슈의 포스터를 싣고 가는 장면에 등장하는 음악은 드뷔시의 '달빛'이다. 드뷔시의 피아노 모음곡 '베르가마스크'에 세 번째 곡이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반 비디오류를 판매하는 곳이자 대여점, 중고거래점이기도 한 츠타야.

학교 장면은 아시카가시의 쿄와중학교에서 촬영.

작가와 독자가 함께 쓰다시피 한 인터넷 소설의 형식을 영화 속에도 차용했다. 주인공 소년이 좋아하는 릴리 슈슈의 팬클럽 사이트에서 다른 팬들과 나누는 의견이 자막으로 등장한다.

못된 학생인 호시노를 연기한 오시나리 슈고(뒷줄 맨 왼쪽부터)와 괴롭힘을 당하는 주인공 소년을 연기한 이치하라 하야토, 호시노에게 못된 짓을 당하는 피아노 치는 소녀 쿠노를 연기한 이토 아유미.

배우들이 직점 캠코더를 들고 찍은 오키나와 장면은 오키나와의 이리오모테 섬에서 촬영.

이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악역인 호시노다. 초등학생 때 왕따를 당해 전학을 간 호시노는 중학생이 돼서 온갖 못된 짓을 골라하는 악당으로 180도 달라졌다.

강제로 원조교제를 하며 번 돈을 호시노 일당에게 바치는 불쌍한 소녀 츠다를 연기한 아오이 유우. 주인공 역시 강제로 츠다를 감시하는 일을 하게 된다. 주인공을 연기한 하야토는 출연 당시 13세였다.

영화의 대부분은 토치키현 아시카가시에서 찍었다. 철탑과 연 날리는 장면은 시의 하지카교 부근의 강변에서 촬영.

호시노 일당이 피아노 치는 여학생 쿠노를 강간하는 장면은 아시카가시의 폐쇄된 공장인 이시이 프린트 공장에서 촬영. 쿠노를 연기한 이토 아유미는 원래 피아노를 다룰 줄 모르고 악보도 읽을 줄 모르지만 고된 연습을 통해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직접 연주했다. 이토는 삭발도 실제로 했다.

불안한 소년의 심경을 나타내듯 사선으로 기운 앵글이 자주 등장.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는 피아노 치는 쿠노가 자살한다. 릴리 슈슈의 콘서트 현장은 도쿄의 요요기 제 1체육관 앞에서 찍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2disc)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1Disc) : 블루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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