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때론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1983년)이 그런 영화다.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해 주목받던 그는 1976년 대마초 파동으로 단속에 걸려 4년간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힘들게 4년의 공백을 보낸 후 그는 다시 영화를 만들게 되면 소외계층 이야기를 다루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등장한 작품이 바로 1980년대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다룬 이 영화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원작자 이동철이다.
이동철을 알아야 더 잘 보이는 영화
이동철을 모르면, 특히 그가 구술하고 작가 황석영이 대필한 자전 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읽지 않으면 이 영화를 이해하기 힘들다.
'어둠의 자식들'은 온통 욕설과 괄호 속 뜻풀이가 없으면 알아듣기 힘든 은어로 도배돼 있지만 밑바닥 인생들의 황폐한 삶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탓에 책장이 술술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다.
이동철의 본명은 이철용이다.
1980년대 말 정치판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름을 듣고 평화민주당 소속의 한쪽 다리를 절던 제13대 국회의원을 떠올릴 텐데, 바로 그 인물이다.
이동철은 그가 '어둠의 자식들'에서 주인공에게 붙인 이름인데 '꼬방동네 사람들' 등 소설을 쓰면서 필명으로 삼았다.
최초의 지역구 장애인 의원이었던 그는 참으로 극적인 삶을 살았다.
'나는 소설이나 책에 관해서는 X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어둠의 자식들'을 읽어보면 세상에 이런 삶도 있나 싶을 정도로 인생이 기구하다.
동두천의 기지촌에서 유복자나 다름없이 태어난 그는 어려서 결핵성 관절염을 앓아 한쪽 다리를 절게 됐다.
기지촌 아이들이 그렇듯 홀어머니가 돈 벌러 나가면 그는 매춘부들을 위한 호객 행위로 잔돈푼을 벌거나 좀도둑질로 먹고살았다.
한마디로 그는 매춘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던 창녀촌에서 나고 자랐다.
먹고살기 바빠 초등학교도 때려치우고 창녀촌을 전전하며 살아남기 위해 지독한 독기를 부리며 양아치, 깡패로 그악스럽게 살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못 배운 자들의 삶을 바꿔보려고 구두닦이들을 모아 야학을 하며 도시빈민운동에 뛰어들었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에 도시빈민운동을 했으니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
간첩으로 몰려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과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이후에도 탄압의 손길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종이에 정리한 것이 훗날 소설 '어둠의 자식들'의 토대가 됐다.
덕분에 정치권과 연이 닿아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됐다.
13대 의원 이후에도 몇 번 더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10여 년 점쟁이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장애인문화예술개발원을 설립해 장애인들의 예술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어둠의 자식들 2'로 기획
이 영화에는 이동철의 삶이 상당 부분 녹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이장호 감독은 이동철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어둠의 자식들' 후속 편으로 이 작품을 기획했다.
그래서 제목도 '어둠의 자식들 2'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에서 사전 검열을 하며 제목을 쓰지 못하게 해서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
제목만 바꾼 것이 아니라 제대로 영화를 찍지 못하게 하는 정부 조치에 반발해 시나리오도 없이 퍼포먼스 위주의 에피소드 나열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검열로 왜곡되고 표현의 자유마저 제한되던 시기에 우화적인 구성과 이상한 촬영으로 반항한 작품이다.
내용은 바보 소리를 듣는 동철(김명곤)과 육덕(이희성)이 창녀(이보희)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 감독은 세 젊은이를 통해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아래 빈부 격차가 심화되며 계급 간 갈등이 치열했던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우화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 보니 영화는 직설적 표현보다 등장인물들의 황당한 행동들을 통한 은유와 암시로 점철돼 있다.
내용 못지않게 영화는 실험적 구성으로 가득하다.
무성 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대사가 거의 없고 소년의 짧은 내레이션에 의존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또 독특한 전자악기 음향과 저속 촬영 등을 도입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이질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바람에 이 영화는 극장주들과 배급업자들 사이에 이해하기 힘든 재미없는 작품 취급을 받아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1년 뒤 단성사의 상영 예정작이 펑크 나는 바람에 1주일 시한부로 땜빵 개봉했다.
하지만 개봉 후 대학생들 사이에서 실험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많은 관객이 들어 당초 기한을 훌쩍 넘겨 한 달 동안 상영했다.
아마도 군사독재 시절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억눌렸던 젊은이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 성공 요인으로 보인다.
이를 의식한 듯 이 감독도 이 작품을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독재시대가 만든 영화"라고 평했다.
1980년대 사진첩 같은 영화
개인적으로는 추억이 돼버린 1980년대 초반 풍경들을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길거리를 달리는 포니 택시,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도로와 집창촌의 대명사였던 588이 자리했던 청량리역 광장부터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로라 브래니건의 'Gloria', 팝송 메들리 'Stars on 45' 등 귀에 익은 노래까지 모든 것들이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점에서 다시 보기 힘든 사진첩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에 출시된 블루레이는 35mm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2013년 2K 해상도로 디지털 마스터링 한 뒤 다시 2021년 추가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쳐 만들었다.
덕분에 16 대 9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의 화질은 놀랍도록 깨끗하다.
복원이 아주 훌륭하게 잘 돼서 옛날 영화에 흔히 나타나는 잡티나 스크래치 하나 없다.
색상 또한 번지지 않고 자연스럽다.
과거 4 대 3 화면비에 필름 손상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민망할 정도로 화질이 좋지 않았던 DVD 타이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화질이 훌륭하다.
음향은 LPCM 모노를 지원하는데 내레이션 등이 또렷하게 잘 들리고 한글 자막까지 들어있어 감상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부록으로 이 감독과 배우 김명곤, 임수연 씨네21 기자가 참여한 음성해설, 복원 전후 영상 비교, 이미지 자료 등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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