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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DVD / 블루레이

붉은 돼지 (블루레이)

울프팩 2013. 8. 5. 18:40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지구 상에서 낙원을 보려거든 찾아가라'고 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였다.
거기에 주단을 펼쳐 놓은 듯 붉게 빛나는 중세시대 마을의 지붕들.

비단 화가가 아니어도 절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두 편을 통해 거듭났다.
마을 풍경이 온전히 나오는 '마녀 배달부 키키'와 남성들을 위한 낭만적인 작품 '붉은 돼지'(紅の豚, 1992년)다.

이 작품은 제1 차 세계대전 후 아름다운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하늘의 사나이들이 비행 실력을 겨루는 내용이다.
아드리아해는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펼쳐진 바다로, 여기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 작품 속 여인 지나가 머무는 호텔 아드리아노의 배경이 됐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우선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인 그림들이다.
아드리아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푸른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나는 흰 구름들, 여기를 가르는 붉은 비행기 등 색감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그만큼 판타지에 가까운 영화는 낭만적이다.
주인공은 파시즘에 혐오를 느껴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돼 버렸고, 그런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뜨겁게 끓어오르거나 격정적이지 않다.
알 듯 모를 듯 내색하지 않고 은은하며 서로의 눈빛으로만 전달할 뿐이다.

세월이 흘러 펼쳐 든 앨범처럼 그들의 사랑은 지긋한 세월의 무게가 얹힌 농익은 감정이 돼버렸다.
그래서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을 젊은 시절을 흘려보낸 중년들을 위한 작품이라고 칭했다.

여기에는 제작 당시 나이 지긋한 중년이 돼버린 하야오 감독의 개인적인 꿈도 녹아 있다.
어려서 비행기 조종사를 동경했던 그의 꿈과 자라면서 군국주의에 반대하게 된 그의 정서와 생각이 녹아 있기 때문.

실제로 인간 세상에 혐오를 느껴 돼지가 돼버린 주인공은 "파시즘보다 돼지가 낫다"며 군국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더불어 악당 조차도 미워할 수 없는 악동처럼 그려 인간에 대한 강한 애착과 연민을 나타냈다.

아름다운 그림과 낭만적인 이야기, 서정적인 음악이 잘 어우러진 이 작품을 보면 두브로브니크의 파란 하늘과 붉은 지붕이 떠올라 가슴이 뛴다.
지나가 오래 간직한 사진 속 사랑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작이다.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출시한 블루레이는 다행히 본편에 우리말 녹음과 한글 자막이 들어 있다.
1080p 풀 HD의 16 대 9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무엇보다 아드리아해의 찬란한 풍경을 또렷한 색감으로 잘 살렸다.
음향은 DTS-HD 2.0 채널이지만 기총 소리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박력 있게 재현한다.

부록으로 짧은 인터뷰 영상이 들어 있으나 한글 자막을 지원하지 않는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나이가 들며 잃어버린 비행 소년의 꿈과 무정부주의자로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붉은 돼지에 투영했다.
악당은 특이하게 하늘의 해적이란 뜻의 '공적'이다. 공적은 '천공의 성 라퓨타'나 '미래소년 코난' 등 하야오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도 등장한다.
붉은 돼지의 비행기는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S.21F.
공적 맘마유토단의 비행정은 다보아제. 기수와 후미에 기총을 장착한 이 비행정은 시속 193km로 날았다.
호텔 아드리아노의 주인인 매력적인 지나. 원래 이 작품은 하야오 감독이 월간지 '모델 그래픽스'에 연재한 '비행정 시대'가 원작이다.
조종석 묘사가 아주 세밀하다. 원래 하야오 감독의 집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야자키 항공을 운영하며 제로센 전투기 부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하야오 감독은 어려서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다.
비행기 엔진에 지브리 스튜디오를 뜻하는 기블리가 양각돼 있다. 원래 지브리 스튜디오는 하야오 감독이 사하라 사막에 부는 열풍 겸 이탈리아의 정찰기 이름 기블리에서 따왔다. 이를 가타카나로 표기하면서 일본인들이 지브리로 읽어 그렇게 굳어졌다.
하야오 감독은 크로아티아를 방문해 아름다운 아드리아해 풍경에 홀딱 반했다. 이 작품에도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섬 풍경이 그대로 등장한다.
붉은 돼지는 이탈리아의 항공 영웅 이탈로 발보와 닮았다. 그는 1933년 이탈리아에서 미국 시카고까지 43일간 장거리 비행을 해 유명해졌다. 그러나 독일과 동맹을 반대하는 등 군국주의에 반발해 무솔리니의 미움을 샀다. 무솔리니는 그를 식민지 리비아로 쫓아 보냈다. 그는 1940년 그곳에서 토브룩 상공을 경계 비행하던 중 아군이 쏜 고사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래서 타살 의혹설이 제기됐다. 발보의 비행기 사보이아 마체티 SM.55X도 붉은 돼지의 기체를 만든 사보이아에서 만들었고 모양도 닮았다.
수많은 유령기들이 은하수처럼 흘러가는 장면은 로알드 달의 스토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미국인 커티스의 비행기는 커티스 R3C-O. 처음에는 원안을 토대로 30분 안팎의 일본항공(JAL) 기내용 영화로 제작됐다가 장편으로 늘어났다.
붉은 돼지의 본명 마르코 파고는 하야오 감독과 초기에 함께 일한 이탈리아 애니메이터가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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