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섬'(2000년)이 DVD로 국내 출시된 것은 2004년이다.
미국보다 1년 늦게 출시됐는데, 그때까지 나온 김기덕 영화 중에 '섬'과 '나쁜 남자'를 가장 좋아한다.
이 작품은 그때까지 가학, 잔혹 영상으로 대표되는 김감독 작품답지 않게 영상이 아름다워 눈길을 끌었다.
이전 작품들도 그림을 그렸던 김 감독의 특성을 십분 살려 회화적 느낌을 강조하긴 했지만 서정적이거나 아름다운 영상은 이 작품이 한 수 위다.
이전 작품들에서 그가 승부를 걸었던 것은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와 배우들의 강한 연기였다.
아무래도 제작비의 한계상 영상에 공을 들이고 싶어도 여건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르다.
고즈넉히 안개가 깔린 거대한 저수지 위로 낚시집들이 떠 있는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그의 전매특허인 파격적인 이야기를 버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가학적이고 잔혹한 영상들이 화면 가득 선혈을 뿌린다.
특히 유명한 남녀 주인공들이 각각 벌이는 낚시줄 자해 영상은 이 작품을 여러 번 봤는데도 불구하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기 힘들만큼 잔혹하다.
클로즈업과 풀 샷으로 세세하게 잡아내는 영상은 주인공들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끔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외로운 인간에 대한 연민이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서정적인 풍경 속에 홀로 배치된 인물들의 모습은 외로움을 물씬 풍기며 안타까운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기에 잔혹한 영상들도 외로움과 싸우며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여 더 할 수 없이 안타깝고 슬프고 다가온다.
김감독의 독특한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이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훌륭한 작품이 바로 '섬'이다.
막판 섬 모양의 풍경이 여인으로 변신하는 엔딩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1080p 풀HD의 1.78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영상은 괜찮은 편이다.
초반 영상은 지글거리고 윤곽선이 명료하지 못하지만 뒤로 갈 수록 안정된다.
필름 손상 흔적이 더러 보이고 암부디테일이 묻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인 듯 싶다.
그래도 색감이 탁하게 죽은 DVD와 비교하면 일취월장한 화질이다.
참고로 DVD 타이틀은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이었는데, 블루레이는 화면비가 1.78로 바뀌었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리어에서 바람소리가 들리는 등 간헐적인 서라운드 효과가 나타난다.
부록으로 김영진 황진미 평론가의 음성해설, 제작과정, 배우와 제작진 인터뷰, 영화음악을 맡은 전상윤씨의 음악해설, 제작자 이승재의 김기덕을 말하다와 뮤직비디오, 갤러리 등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호수같은 저수지 위에 섬처럼 뜬 낚시집. 부초처럼 흔들리는 우리네 삶도 물 위에 뜬 섬이다.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으며 각종 소품 제작 등 미술까지 담당했다.
촬영은 경기 안성의 고삼저수지에서 했다. 김 감독은 어느 MT를 따라갔다가 산 속에 위치한 저수지 위에 떠 있는 색색의 낚시집을 보고 이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위험한 짐승 서정. 원래 주인공 역할은 방은진 몫이었다. 김감독이 서정을 본 후 "내가 찾는 눈빛이었다"며 고집을 부려 그에게 돌아갔다. 이후 방은진과 김감독은 '수취인불명'을 찍을 때까지 소원해졌다.
서정은 이 작품에서 살아있는 지렁이를 물어 끊고, 개구리 껍질을 벗기는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했다. '박하사탕'에 단역으로 나왔던 그는 누군가 소개로 김 감독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섬'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나쁜 남자'의 히로인 서원. 서정 역할을 노리고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다방아가씨로 낙점됐다. 이 작품에서는 박성희라는 본명을 사용했다.
촬영은 '악어' 연출부에서 인연을 맺은 황서식 촬영감독이 맡았다. 그는 배 위에 카메라를 싣고 이동하며 찍거나, 유리로 수족관 닮은 기구를 만들어 물 속에 사람과 카메라가 함께 들어가 수중 장면을 찍었다.
저수지에 비 오는 장면을 위해 강우기를 동원. 강우기 세팅에 보통 2시간 이상 걸리는 데 이를 기다리지 못한 김 감독과 강우기 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극 중 서정의 역할은 대사가 전혀 없다. 실제 서정의 목소리는 예쁘다. 서정은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숙소가 아닌 세트에서 난로를 피우고 잤다.
문제의 충격 씬 가운데 하나. 자살하기 위해 낚시 바늘을 삼킨 뒤 낚시 줄을 당겨서 자해를 하는 장면.
음악은 미대 서양화과를 나와 잡지사 사진기자 등을 지낸 전상윤이 맡았다. 그는 '조용한 가족' '실제상황' 등의 음악을 담당했다.
김 감독은 그를 다룬 책 '김기덕'에 실린 자필수고에서 "매일 동서남북이 바뀌는 공간이 없을까. 자고 나면 서쪽이 동쪽이 되는 그런 공간을 그리워했다"며 '섬'의 제작 동기를 밝혔다.
나머지 충격 씬. 자궁에 낚시 바늘을 밀어넣은 뒤 낚시 줄을 당겨 하혈을 하고 투신한다. 이 장면 때문에 김감독은 여성을 마구 다룬다는 비난을 받았다.
섬의 상징적인 장면.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화법을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화면. 서정은 초겨울에 이 장면을 찍고 안성시립병원에 실려갔다. 서정은 책 '김기덕'에 실린 인터뷰에서 "김 감독과 연애하듯 영화를 찍었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다투기도 많이 다퉈, 제작진들이 연애한다고 오해할 만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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