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암살

울프팩 2015. 7. 25. 21:59

국민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에 유명한 어린이 잡지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고 육영수가 1967년 창간한 '어깨동무'다.

 

20년 뒤인 1987년 종간됐는데, 당시 '소년중앙'과 더불어 꽤나 유명했던 어린이 잡지였다.

이 잡지에 연재된 만화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첩보원 36호'다.

 

1960년대 스포츠 만화로 유명했던 백산(본명 최일부)이 그린 이 만화는 일본 강점기 시절 임시정부의 첩보공작조 활약을 다뤘다.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백산이 선 굵은 필체로 그려낸 거친 사나이들의 활약이 어찌나 강렬했던 지 지금도 제목을 잊지 못한다.

 

이 작품은 원래 이이녕의 대하장편소설이 원작인데 소설보다 만화가 더 기억에 남는다.

2010년에 만화가 재간된 적이 있고 5권의 원작소설도 이후 다시 출판됐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년)은 '첩보원 36호'를 많이 떠오르게 한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과 손잡고 암살조를 당시 조선 경성에 파견해 친일파 거부와 조선주둔군 일본군 사령관을 암살하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는 허구이지만 이 과정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와 시대상이 켜켜히 스며 들었다.

지금 신세계백화점의 전신인 미츠코시나 김구, 김원봉처럼 실존 인물과 사실들이 그대로 나오기도 하고, 암살조로 나온 여성 암살자(전지현)는 조선총독 사이토와 주 만주국 일본대사 무토 암살을 기도했다가 체포돼 처형된 남자현을 떠올리게 한다.

 

나머지 암살조들의 활약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이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치열한 총격전 끝에 순국한 김상옥 등 여러 항일 열사들의 모습이 중첩돼 있다.

또 일본에 붙어 독립 운동가를 배신하고 해방 후 경찰간부까지 지내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간자의 모습은 노덕술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파편처럼 흩어진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짜맞춰 한 편의 액션극으로 꾸며냈다.

따라서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오달수, 조진웅 등 스타들이 펼치는 요란한 총격전이 볼 만 하다.

 

하지만 '타짜' '도둑들' 등 최동훈 감독의 히트작들이 그렇듯 볼거리에만 치중할 뿐 깊이가 없다.

인물들 간의 관계 설정이나 성격 묘사는 스쳐 지나는 인연 만큼이나 가볍고, 역사의 파편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맞추다 보니 구성이 산만하다.

 

아무래도 정해진 시간 안에 여러가지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욕심이 과한 듯 싶다.

그렇다 보니 중간 중간 늘어지는 부분들도 있다.

 

또 "우리 잊으면 안돼" 같은 신파조 대사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이다.

그럼에도 최 감독 특유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는 만큼, 할리우드의 킬링타임 액션 영화처럼 가볍게 시간 때우기용으로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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