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있는 일정으로 핀란드 헬싱키를 찾는 사람들은 에스토리나의 탈린을 거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간다.
모두 헬싱키에서 가깝기 때문.
에스토니아는 인구 138만명의 작은 나라로, 중세시대 한자동맹의 일원인 탈린이 무역중심지로 번성했다.
17세기 이후 스웨덴과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았고, 러시아 혁명 직후 1918년부터 2년간 전쟁을 치러 독립했다.
하지만 1940년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다시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됐고, 1991년 소련 붕괴 후 독립했다.
핀란드인들은 된 발음으로 딸린이라고 부르는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다.
러시아에서 떨어져나온 에스토니아는 빠르게 서구화해 유럽연합(EU) 뿐 아니라 나토 가맹국이 됐다.
그 바람에 러시아는 에스토니아에 눈독을 들이면서도 함부로 군사적 공세를 취하지 못한다.
헬싱키에서 탈린은 아주 가깝다.
페리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 가량 내려가면 항구도시 탈린이 나온다.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쾌속선을 타면 좀 더 빠르지만, 배가 작아 심하게 흔들려 멀미가 난다.
이왕이면 좀 더 걸리더라도 페리를 타는 게 좋다.
페리는 9층 높이의 커다란 여객선이다.
1등실, 2등실, 일반선실 등 요금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어 있으며 내부에 카지노, 식당, 면세점, 잡화점, 오락실, 기업인들을 위한 회의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날씨가 궂으면 일어섰을 때 배가 약간 기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흔들림이 거의 없어 멀미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
오전 7시반에 출항하는 페리의 2등실을 타고 건넜는데, 특별한 것은 없고 무료로 제공하는 간단한 샐러드바와 음료가 있을 뿐이다.
주말이면 헬싱키에서 탈린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대거 이동한다.
페리의 경우 커다란 트럭까지 여러 대 탑재할 만큼 큰 배여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고 배에 오른다.
이유는 한가지, 살인적인 물가인 헬싱키에 비해 탈린의 물가가 엄청 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싱키 사람들은 거의 연료가 바닥 난 자동차를 몰고 페리에 올라 탈린에서 가득 주유한 뒤 온갖 물품을 차에 한가득 채워 돌아간다.
차가 없는 사람들도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를 2개씩 끌고 다닌다.
특히 술값과 농산물 가격이 엄청 싸다.
그래서 술들을 많이 구입한다.
돌아가는 페리에서 보니 한 두 병이 아니라 아예 몇 상자씩 카트에 실어 끌고 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봤다.
탈린 관광의 핵심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올드타운, 즉 구시가지다.
항구에서 걸어서 15~20분이면 충분히 갈 만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올드타운은 중세시대 귀족과 부자 등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성을 쌓고 살면서 발전했다.
지금도 중세시대 성의 윤곽과 건물들, 그때 조성된 거리가 남아 있어 시간이 정지된 동화속 마을 같다.
마침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어서 구시가의 중심부인 라에코야 광장에 커다란 트리와 함께 크리스마스 장이 섰다.
헬싱키와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이 많은 상품을 갖고 나와 팔고 있었다.
광장 한 켠에는 핀란드 사람들이 산타 할아버지의 루돌프로 믿고 있는 순록이 몇 마리 끌려 나와 우리 속에서 먹이를 먹고 있었다.
광장에서 가장 큰 건물이 옛 시청사인 라에코다이다.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청사인 이 건물은 1320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 켠에 65미터 가량의 전망탑이 있다.
평소에는 개방돼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으나, 공교롭게 방문한 날 준비 중인 행사 때문에 폐쇄돼 오르지 못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시청사 맞은편에는 1422년부터 약국으로 쓰인 라에압텍이 있는데, 지금도 영업 중이다.
포석이 깔린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둥근 지붕이 인상적인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교회가 나온다.
1901년 러시아 시대에 지어진 곳으로, 유럽 교회들이 그렇듯 높은 천장과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교회 맞은 편에 분홍색 벽의 톰페아성이 있다.
중세 시절부터 지배자들이 거주했던 이 곳은 현재 에스토니아의 국회의사당으로 쓰인다.
톰페아 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면 탈린에서 가장 높은 올레비스타 교회를 볼 수 있다.
11세기 노르웨이왕 올라브2세의 이름을 딴 이 교회는 탈린에서 가장 높은 159m의 탑이 있다.
이처럼 올드타운은 좁은 골목까지 둘러봐도 두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점심은 광장 근처 식당들에서 많이들 먹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과거 한자동맹 건물로 쓰였던 올데한자다.
꿀맛이나 계피맛 맥주와 돼지고기 등이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가이드를 맡은 핀란드 동포분은 이 곳보다 올데한자 맞은편에 위치한 peppersack을 더 추천했다.
특히 그 곳의 swordsman's feast for 2 라는 메뉴는 숨 넘어갈 만큼 맛이 있다.
갖은 소스로 양념해 구워낸 우리식 돼지족발 같은 요리인데, 껍질은 바삭바삭 하고 고기를 살살 녹을 듯 부드럽다.
여기에 감자요리 등이 함께 나오는데 하나를 시키면 2,3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다.
이 집에서도 계피맛과 꿀맛 나는 맥주를 파는데 아주 맛있다.
식사를 하고 성문을 벗어나 신시가지로 접어들었다.
신시가지는 그다지 볼 것이 없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은 스토크만 백화점 근처에 새로 지은 신축 건물들과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마침 호텔 비루에 1980년대 팝스타였던 FR 데이비드의 콘서트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어 반가웠다.
과거 'words' 'Pick up the phone' 등이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하며 인기를 끌었는데, 머나먼 이곳 에스토니아에서 그의 공연 안내문을 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역시 에스토니아도 핀란드와 마찬가지로 겨울철에는 해가 일찍 진다.
오후 4시 이후에는 마치 밤 같다.
다시 탈린 구시가지로 들어와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오후 6시반 배를 타고 헬싱키로 돌아왔다.
갑판에 나가 봤더니 어찌나 바람에 세차게 부는 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래도 알차게 탈린 구경을 잘했다.
날씨만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눈이나 비가 오지 않은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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