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비추천 DVD / 블루레이

역린(블루레이)

울프팩 2022. 2. 14. 00:31

정유년인 1777년 7월 28일 벌어진 정유역변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왕정국가인 조선에서 절대 권력인 왕을 신하들이 암살하려다 실패해 몰살당했다.

 

사건의 발단은 주모자로 알려진 홍상범의 아버지인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가 관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돌렸다가 흑산도로 귀향 가면서 시작됐다.

요즘으로 치면 횡령을 한 셈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왕의 호위군관이 가담한 역모사건

아들 홍상범은 아버지가 억울하게 누명을 섰다고 생각해 노론 벽파와 손잡고 정조를 죽인 뒤 서자인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민다.

그는 왕의 호위군관 강용휘를 포섭해 궁으로 들어갈 길을 텄다.

 

강용휘는 궁인이었던 딸 강월혜와 조카인 궁중별감 강계창, 천민 출신 장사꾼 전흥문을 끌어들여 암살 사건을 준비한다.

강용휘와 전흥문은 강월혜와 강계창의 인도로 왕의 서재이자 침전인 경희궁의 존현각 지붕 위로 숨어들었다.

 

그들이 침입하기 위해 지붕 위에서 기와를 들어내는 순간 정조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호위군관들을 불렀다.

결국 암살자들이 황급히 도망치면서 암살 음모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정조는 위기의식을 느껴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홍상범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암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전흥문이 창덕궁을 월담하다가 체포되면서 사태가 틀어졌다.

정조는 한밤중에 친국을 열어 직접 암살자 심문에 나섰고 자백을 받아 홍상범과 강용휘 등 일당들을 모두 체포했다.

 

결국 홍상범은 거리에서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찌르는 책형을 받고 죽었다.

왕을 보호하는 호위군관이 왕의 암살에 가담한 것은 조선시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역모가 부른 조선 최강의 군대 장용영의 탄생

이후 정조는 군사제도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바꿨다.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 등 5군영 중심이었고 이를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군사력을 장악하지 못한 왕은 어떠한 위협에도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그만큼 정조는 불안한 위치에 있던 군주였다.

 

정조는 정유역변을 계기로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직접 칼을 댔다.

훈련도감에서 최고 실력을 가진 무사들을 뽑아 일종의 친위부대인 장용위를 세운다.

 

장용위는 이후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숫자가 계속 늘었다.

정조는 최측근 무사인 백동수와 함께 우리 무술을 총정리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고 이를 장용위의 기본 병서로 삼았다.

 

정조는 즉위 10년 차에 장용위를 앞세워 무장 구선복의 역모 사건을 밝혀내 제거하고 군권을 확실하게 틀어쥔다.

구선복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정조를 위협할 무력은 없어졌다.

 

정조는 이를 빌미로 5군영의 중심인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했다.

하지만 정조는 장용위를 중심으로 노론을 확실하게 제거할 준비를 했으나 갑자기 급서 하는 바람에 무위로 끝났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1세 어린 나이로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 정조와 대립하며 노론을 밀었던 정순왕후가 실권을 쥐고 수렴청정에 나섰다.

그때부터 정순왕후와 노론은 왕의 친위대이자 최강의 군사력이었던 장용영 해체에 집중했다.

 

그렇게 끈이 떨어진 장용영은 정조가 죽고 나서 2년 뒤 해체돼 사라졌다.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장용영을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했다면 이후 정세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장용영 설치로 이어진 정유역변은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인 셈이다.

이재규 감독의 '역린'(2014년)은 바로 정유역변을 소재로 다룬 영화다.

 

◇정유역변의 하룻밤을 그린 영화

그러나 역사적 의미의 전후 맥락을 깊이 있게 짚은 것은 아니고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에 집중했다.

그것도 사실에 충실하기보다는 이야기와 볼거리에 치중해 가상의 내용을 덧입히면서 액션 드라마로 몰고 갔다.

 

그 바람에 정순왕후를 악의 중심으로 지나치게 확대하면서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등 역사적 사실과 다른 황당한 내용들이 들어갔다.

궁인과 왕의 측근이 음모에 가담한 것은 맞지만 재미를 위해 브로맨스를 연상케 하는 가공의 이야기들을 곁들이면서 사실과 다른 드라마가 돼버렸다.

 

또 정조가 명궁 소리를 들을 만큼 활을 잘 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직접 왕이 칼을 휘두르며 암살자와 대결하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피투성이가 되는 왕의 모습을 통해 당시 정조의 불안했던 위치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졸지에 왕을 액션 스타로 만들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액션스타가 된 왕, 지나치게 작위적인 내용

영화는 크게 세 남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불안한 왕 정조(현빈)와 왕의 최측근 내시 상책(정재영), 왕을 죽이기 위해 침투하는 암살자 을수(조정석)다.

 

정조를 중심으로 이들이 사건을 진행하기 위해 여러 인물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문제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번잡스럽고 산만해져 집중력을 잃었다.

 

여기에 정적인 순간이 많고 서로 마주 앉은 투샷처럼 고정된 앵글이 반복되면서 다소 지루한 감이 든다.

그럼에도 고낙선 촬영감독이 찍은 수려한 인상은 높이 쳐줄만하다.

 

야밤에 거울처럼 반사된 강 위로 배가 미끄러지는 장면이나 곡식이 일렁이는 황금 들판, 올라오는 왕의 조복 너머로 엎드린 궁인들을 잡은 세답방 풍경과 막판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푸른 먼지 사이로 왕이 말을 몰고 달려오는 장면들은 한 폭의 그림 같다.

또 쏟아지는 비를 뚫고 기와지붕을 달려 내려오는 암살자들과 눈처럼 쏟아지는 빗방울을 배경으로 왕과 암살자가 칼을 맞대는 액션 장면도 인상적이다.

 

용의 목덜미에 거꾸로 박힌 비늘을 건드리면 죽는다는 설화에서 빗댄 역린은 곧잘 왕의 노여움으로 표현된다.

불안한 침묵의 군주였던 정조는 정유역변을 계기로 역린을 드러내며 왕권을 다지는 군주로 일변한다.

 

다만 이런 과정을 사실적으로 깊이 있게 묘사하지 못하고 작위적인 내용 중심으로 산만하게 펼쳐놓으면서 긴장감을 잃은 것이 이 작품의 한계이자 안타까운 부분이다.

1080p 풀 HD의 2.3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평범한 화질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장면과 어두운 밤 장면 등에서 디테일이 살아나지 못해 아쉽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적당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리어 채널에서 천둥소리가 작렬하는 등 채널 분리는 잘 된 편이다.

부록으로 감독과 현빈 정재영 조정석 한지민이 참여한 음성해설, 제작 과정, 감독과 배우들 인터뷰, 제작 보고회와 무대 인사, 액션 연출과 포스터 촬영 등 풍성한 내용이 들어 있다.

 

모든 부록은 HD 영상으로 제작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현빈의 근육이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은 현빈이 군 제대 후 처음 출연한 영화다.
수려한 영상은 고낙선 촬영감독이 찍었다. 그는 '택시운전사' '내부자들' '관상' '범죄와의 전쟁' 등을 촬영했다.
한지민이 정순왕후를 연기. 사극 톤을 지나치게 의식했는지 대사처리가 어색하다.
박성웅이 홍국영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은 1777년 7월28일 발생한 정유역변을 토대로 했다.
조정석이 비밀조직에서 키운 암살자로 등장. 감독은 왕이 즉위하자마자 암살사건을 겪은 것이 재밌어 관심을 가졌다.
왕의 옷을 관리하는 세답방은 전주영화스튜디오에 만든 세트다.
이 감독은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등 인기 드라마를 연출하다가 이 작품으로 처음 영화를 연출했다.
명궁 소리를 듣는 정조는 반으로 쪼갠 대나무통에 화살을 넣어서 발사해 속도를 높인 편전을 잘 쏘았다.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 이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스물 다섯 나이에 즉위했다.
암살자 을수나 내시 상책 등은 가공의 인물이다.
암살자들이 궁의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은 헬리캠을 사용해 촬영. 추운 날 기와에 물을 뿌리고 찍다가 얼어붙어 사람들이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정조는 서재인 존현각에서 자며 밤새 책을 읽고 자신을 견제하는 신하들의 눈을 피해 운동을 했다. 존현각 세트는 전남 담양에 만들었다.
현빈을 비롯해 배우들은 승마와 검술, 궁술 훈련 등을 받았다. 왕이 상책의 시체를 보는 장면에서 배우 정재영의 목 부분 경동맥이 뛰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를 지웠다.
이 작품은 전국에서 384만명이 들었다. 영화 개봉 후 소설도 나왔다.
현빈은 말을 타다가 떨어져 약간 다치기도 했다.

'비추천 DVD / 블루레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82년생 김지영(블루레이)  (0) 2022.02.26
할로윈 킬즈(4K)  (0) 2022.02.19
부그와 엘리엇(블루레이)  (0) 2022.02.03
론 레인저(블루레이)  (0) 2022.01.22
23아이덴티티(블루레이)  (0) 2022.01.14